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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혜원 | 2016.04.17 14:02 | 조회 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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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17

    주일 낮 예배

    본문말씀(사무엘하 19:1-15)

     

    전쟁은 상대를 죽이고 노략물을 빼앗고 굴복시키는 것이죠? 상대를 살리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었던 성경의 전쟁은 그런 전쟁이 아닙니다. 다윗이 전쟁하러 나가는 군사를 거느린 장수들인 요압, 아비새, 잇대에게 명령을 합니다.

    요압은 다윗의 군대 장관이었고, 아비새는 요압의 동생인데, 잇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잇대는 가드의 장수인데 사람을 거느리고 다윗을 죽이러 왔다가 잡혀서 옥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망명을 가면서 잇대를 풀어주고 돌아가라고 하는데도, 잇대는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다윗을 붙좇습니다. 그렇게 잇대는 다윗과 함께 망명을 가다가, 압살롬과 전쟁을 하게 되는 상황이 되자 다윗이 잇대에게 군사의 삼분의 일을 맡겨 전쟁에 나가게 합니다. 다윗이 그 전쟁에 함께 나가려고 하니까 모든 병사들이 당신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전쟁에 나가지 마소서라면서 말립니다. 그래서 다윗은 전쟁에 나가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 장수들에게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 명령을 세 장수들뿐만 아니라 모든 병사들이 다 들었습니다.

     

    전쟁에 시작되었는데, 압살롬이 누군가와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해 도망가다가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노새는 달아나 버리고 압살롬은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메달리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한 병사가 요압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요압은 11절에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라고 화를 내면서 네가 압살롬을 죽였더라면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그 병사는 내 손에 은 천개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 손을 대지 아니하겠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라고 대답하면서 자기는 압살롬을 죽일 수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 말을 들은 군대장관 요압은 1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이 말은 나는 너하고 달라.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나는 절대로 압살롬을 살릴 마음이 없어. 나는 압살롬을 죽여야 해.’ 이것이 요압의 마음입니다.

    참전하면서 이 병사가 처음 가졌던 마음은 아마도 요압이 가졌던 마음과 똑 같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전쟁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가족들을 놔 두고 전쟁터로 가는데 하루 이틀에 끝날 전쟁도 아닌데다가 생명의 안전을 보장 할 수도 없는 게 전쟁이쟎아요. 그래서 이 병사는 속으로 배은망덕한 자식. 어떻게 아들이 되어가지고 아버지를 쫓아내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켜? 내가 이번에 만나면 죽여 버릴거야!’ 이런 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아침에 다윗이 나 다윗을 위해서, 나를 생각해서 너희들은 이번 전쟁에서 압살롬을 죽이지 마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압살롬을 살려서 데려오는 전쟁이 되었습니다. 이 병사는 압살롬을 죽이려 했었는데, 다윗의 말이 선포된 이후부터는 압살롬을 죽이려면 압살롬을 죽이지 마라라고 말한 다윗의 마음을 죽여야만 압살롬을 죽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말을 무시하고 짓밟고 거절하기 전에는 압살롬을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에서 왕을 조금이라도 의식한다면 죽이고 싶어도 못 죽일뿐더러 죽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병사가 그 말을 듣고 전쟁하러 갔는데 이 친구 앞에 압살롬이 대롱대롱 달려 있단 말입니다. 칼로 찌르면 한 방에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달려있어서 그냥 죽이면 되는데 이 병사는 그 상수리나무에 달려있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못 죽이는 거예요. 양심의 가책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요압 앞에 하는 말을 통해 보면 다윗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른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왕이 내 아들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왕의 부탁이 아니고 명령이었습니다. 병사는 왕의 명을 받아들인 순간 압살롬을 죽이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죽이고 왕의 마음을 품은 것입이다. 그래서 요압에게 나는 절대로 죽일 수 없다.’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요압은 나는 너처럼 지체할 수 없어.’ 하고 가서 압살롬을 죽입니다.

     

    똑같이 다윗의 명령을 들었는데 왜 이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 다른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같이 이야기해 나가려고 합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늙은 종과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느 날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 있는 늙은 종을 불러 너는 내 고향에 가서 내 친족 중에 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내 아들 이삭의 아내를 삼게 하라.’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들었던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인님, 내가 당신이 시키는 대로 당신의 고향에 가서 당신 아들의 아내 될 여자를 만나는데 아무도 따라오고자 아니하면 내가 당신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가서 이삭을 실제로 보여주고 아내 될 사람을 구해올까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삼가 그리하지 마라.’ 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냥 부드러운 이야기가 아니고 굉장히 강하게 거부하는 이야기예요.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늙은 종에게 당신의 간증을 해줍니다. ‘나를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내고 내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너보다 먼저 사자를 보내서 내 아들 이삭의 아내 될 여자를 준비 해 놓았어. 너는 가서 취하여 데리고 와. 만일 네가 여자를 데려오지 못하면 오늘 너와 나 사이의 약속은 의미가 없어.’ 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미 아내 될 여자를 준비해두셨기에 네가 내 말을 믿으면 그 여자를 데려 올 수 있어. 반대로 네가 나를 믿지 않으면 못 데리고 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늙은 종이 이삭이 아내 될 여자를 데려오기 위해서 해야 될 일은 무엇입니까? 자기생각만 빼면 됩니다. 아브라함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아브라함이 시키는 대로 하려면 자신의 생각을 빼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땅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먼저 정탐을 보냅니다. 열두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 두명을 보냈는데, 정탐한 후에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서로 달랐습니다. 열 명의 사람들은 그들이 보고 느낀 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은 장대하고 키가 큰 아낙자손이고,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었을까요? 이들도 똑같이 가나안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의 눈에 보여진 가나안땅을 본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 있는 가나안땅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세계가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은 너무나 다릅니다. 열왕기하 6장에서 아람군사들이 도단에 있는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성을 둘러 싸고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그 광경을 보고 엘리사 앞에 나가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면서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사환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고 있으니까 사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환의 눈에는 형편밖에 안 보이는데 엘리사의 눈에는 하나님이 엘리사를 지키시기 위해 보내신 불말과 불병거가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쉴 수가 있는 겁니다. 사환이 엘리사가 보는 세계를 보게 되니까 두려움에서 벗어나 웃고 다닐 수가 있는 거지요.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안에 있는 가나안을 보니까 그들이 아무리 큰 아낙자손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밥으로 보이고 그 세계가 안 보이는 열 명의 정탐들은 가나안이 두렵고 부담스러운 대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 늙은 종이 아브라함과 함께 갈대아우르를 떠나 나왔다면,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에서 나온 후 25년 만에 이삭을 얻었고,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였고, 이삭의 아내를 구할 때는 이삭의 나이 40세 였으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산지가 65년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65년을 아브라함을 섬기고 살았다면 아브라함의 기침소리만 들어도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늙은 종이 육신의 아브라함은 문제없이 섬겼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발을 디디려고 하는 믿음의 일 앞에서는 아브라함의 마음과 이 늙은 종의 마음이 다른 거예요.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늙은 종은 자기 마음을 가지고는 절대로 아브라함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이 늙은 종이 아브라함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내어 놓았을 때 자신의 마음이 버려지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자리를 잡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찌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찌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 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찌니라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준비해놓았는데, 네가 나와 마음이 다르면 하나님이 준비한 그 여자를 데려 올 수 없지만 네 마음이 내 마음과 같아지면 너는 내 아들 이삭의 아내를 데려올 수 있어라는 뜻입니다.

     

    오늘 읽었던 말씀으로 가겠습니다. 압살롬과 전쟁을 하러 가는 모든 병사들이 다윗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 전쟁에 불려온 병사들은 다 압살롬을 죽이고 싶어 할 것입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기 때문에 자기의 삶을 뒤로 하고 죽을지 살지 모르는 전쟁에 오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병사는 압살롬을 죽이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음을 버리고 다윗의 마음을 받았기 때문에 상수리나무에 메달려 있는 압살롬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병사는 먼저 자신을 죽였기 때문에 다윗의 마음을 받아들여 압살롬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 압살롬은 왜 죽었습니까? 다윗과 다른 마음을 가진 요압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이 전쟁에는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는 다윗의 마음이 선포되었는데도, 자기 마음으로 사는 요압에게는 다윗의 마음이 죽임을 당하고 압살롬 또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러 오신 게 아니고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귀신들린 자는 귀신에서 벗어나고, 병자는 병에서 낫고, 어떤 문제를 만났든지 그 문제에서 벗어나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또한 예수님과 똑같은 삶을 삽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요압처럼 죽이는 일을 합니다. 본인도 스스로 올무에 걸리고, 법으로 자신을 묶고, 주변의 사람들도 죽이게 됩니다.

     

    압살롬이 한 일은 죽어 마땅한 일입니다. 아버지를 반역해 쿠테타를 일으키고,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의 후궁 열 명을 왕궁 옥상에서 백주대낮에 강간을 한 압살롬은 절대 살려두어서는 안 되는 패륜아입니다. 그런 압살롬을 다윗은 살리고 싶어합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 또한 마땅히 죽어야 할 여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자를 살립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살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9장에 보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숨어 살고 있었는데, 다윗이 그를 찾아 다윗이 거하는 왕궁으로 데려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밭을 다 므비보셋에게 주고, 므비보셋을 왕자 중 하나처럼 다윗의 상에서 음식을 먹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사무엘하 19장에서는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이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되고,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므로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다윗이 왕궁에 돌아 올 때 므비보셋이 수염도 깎지 않고, 옷을 빨지도 않고, 발에 맵시도 내지 않은 상태로 다윗을 맞으러 나옵니다. 그러면서 시바가 자신을 속이고 다윗 왕에게 자신을 참소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 사무엘하 1928, 29, 30절을 읽겠습니다.

     

    삼하19:28 내 아비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었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게 오히려 무슨 옳음이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29절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30절 므비보셋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성경에 기록된 므비보셋의 말은 어떤 마음에서 나왔습니까? 다윗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왕자 중 하나처럼 받았고 왕궁의 삶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어떻게 삽니까? 생각에 끌려 다니고 형편에 끌려 다니니까 시바에게 농락당하는 삶을 산 겁니다. 그렇게 사는 므비보셋을 보면서 다윗이 꾸짖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삼상 20:14 -16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찌어다 하니라

     

    이 약속에 의해서 원수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다윗의 아들처럼 다윗의 상에서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다윗과 함께 왕궁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맺어진 약속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서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에게 속해 버린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인데, 하나님과 예수님사이에 맺어진 약속으로 인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약속을 이 땅위에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 때문에 므비보셋을 살릴 뿐만 아니라 므비보셋을 자기 아들 중 하나처럼 살게 합니다. 그러면 이 므비보셋에게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의 입에서는 내게 오히려 무슨 옳음이 있어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라는 말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는 아버지를 향해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신발을 신깁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의 허랑방탕했던 삶이 아무 문제가 안 되는데, 형은 문제를 삼습니다. 다윗 또한 압살롬이 죽일 수 없는 아들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요압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요압의 마음에는 압살롬을 살려두면 나라가 어지러워져, 그 놈은 반드시 죽여야 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다윗의 마음이 요압의 마음에는 없습니다. 다윗을 위해 전쟁하러 가는 병사들은 다윗의 마음을 가지고 전쟁에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들에게 자기의 마음을 이야기 하는데, 한 병사에게는 그 마음이 들어가서 압살롬을 살리는데, 요압에게는 그 마음이 들어가지 않으니까 다윗을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마음을 안 바꾸고 자신의 마음으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의 좋은 마음, 성실한 마음, 깨달은 마음으로 열심히 주를 섬겨도 주님은 그것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남의 회사에 취직해 일을 하는데,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안 하고 내 마음대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사장이 그 사람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성질 급한 사람은 당장 내일부터 오지 마세요 라고 할 것입니다. 반대로 일은 좀 못하더라도 사장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은 사장이 데리고 일을 가르쳐 줄려고 하지 잘라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이 성경에서 다윗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전쟁을 이기고 지느냐에 마음이 없고 압살롬을 살리는 데 그 마음이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은 다윗의 마음을 받아서 살리는 전쟁을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셨듯이 이들도 압살롬을 살리는 전쟁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도 다메섹에서 집회가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공문을 받아서 그 사람들을 잡으러 가고 있었는데,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하늘로서 홀연히 빛이 비치면서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게 됩니다. 구원을 받은 후 바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그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능욕하고 죽이는 삶이었는데,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자신이 핍박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와 마음이 바뀌어 버리니까 자기가 능욕하고 핍박했던 사람들이 섬겼던 복음을 전하는 고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바뀌니까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하러 나가는 병사들이 다윗의 말을 들었는데, 요압은 다윗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요압은 다윗을 마음의 왕으로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맞는 말은 받아들이고 자기와 맞지 않는 말은 거절하고 무시합니다. 그러나 한 병사는 다윗의 말이 자기의 마음에 맞는 지 맞지 않는 지를 따지지 않고 왕의 말씀이니까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과 안 맞을 때도 있고, 맞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식과 여러분의 깨달음과 맞지 않을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면 여러분을 만나는 사람들이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요압처럼 자기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주의 마음을 버린다면 여러분을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다 법과 올무에 갇혀 죽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는 사도바울처럼 잔해하고 핍박하고 결박하는 일을 서슴없이 했다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난 이후 바울의 삶이 달라졌던 것처럼 여러분의 생애에도 이 삶이 찾아와서 이제 살리는 일에 쓰임을 받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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