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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동현 | 2015.03.10 14:25 | 조회 5258

    주일 낮 예배

    본문말씀 [룻기 3:1 13]

      

    사람들은 지혜, 총명, 권력, 돈이 있으면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는 있지만 생명을 다스리지는 못합니다. 천하를 흔들고, 남을 죽이고 살리는 권력을 가질 수는 있지만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명은 재천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땅이 형성된 이 후 지금까지 죽음을 이긴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만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께 가면 우리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이기지 못하지만 예수님이 이겨주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와 병,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삼으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한 여인이 고통스러워하며 병을 이겨보려고 의원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돈도 없고, 찾아갈 의원도 없고 오히려 병은 악화되었습니다. 그때 그 여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네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예수를 만났던 38년 된 병자가 낫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신 들린 자가 정상이 되었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인의 마음에 나도 예수를 만나면 병이 낫겠구나.’라는 믿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여인이 예수를 만나려고 무작정 길을 나섰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 뒤쪽에서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는데 혈루 근원이 곧 말라서 여자의 병이 나았습니다.

      

    우리 형님이 8년이라는 세월 동안 8가지의 병에 걸려 누운 자리에서 꼼짝도 못했습니다. 형님은 누워서 집에 불이 나기를 애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야 어머니와 가족들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제가 서울에 올라와 축구를 하고 있을 때 형님이 버림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친척뻘 되는 손 모친님이 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리어카에 형님을 태워 교회에 데려다 놓고 아침, 저녁으로 복음을 전해서 형님이 구원을 받으셨습니다. 그 형님이 누워서 성경을 읽는데 요한복음 5장의 38년 된 병자에 대한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는데, 놀랍게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형님이 이 말씀을 읽다가 이 말씀이 그대로 믿어졌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나에게도 일어나라고 하는구나. 나에게 하는 이야기네?’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형편은 8년 동안 누워서 해골처럼 되었는데, 그 말씀을 받아들이니까 그때부터 마음에서 나 일어난다. 산다.’라는 마음이 올라와서 어느 날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38년 된 병자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순간에 형님 마음이 살아나고 얼마 후에 일어나 걸어 다니시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사실입니다. 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어 하시냐? 룻이 보아스의 잠자리에 들어갔는데 보아스는 전혀 몰랐습니다. 보아스가 잠을 자다가 발치에 뭐가 걸려 바라보니 어떤 여자가 누워 있는 거예요. 그 상황에서 보아스가 그 사실을 드러낸다면 룻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해야 합니다. 누가 룻을 그 죽음의 자리로 밀어 넣었습니까? 시어머니 나오미였습니다. 왜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의 품에 들어가게 할까요. 저희 형님이 병에 걸렸을 때 모든 사람들이 저주, 불행이라며 측은하고 불쌍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나 8년이 지나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이것은 재앙이 아니고 축복이었습니다. 저주처럼 보이는 형편이었지만 영원한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약속을 얻었단 말입니다. 그걸 통해 잃었던 생명을 찾았고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룻이 누운 자리는 보아스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리입니다.

    지난주에 굿뉴스코 14기로 해외봉사활동을 나가는 학생들 마지막 훈련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사무국에서 연락 온 유급자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유급된 그 학생들 4명에게 자신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물었지만 하나처럼 자신들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요즘 한국 학생들은 부모들이 자식을 하나나 둘 낳아 애지중지 키워 마음을 꺾어 준 적이 없는데다, 젊은 사람들끼리 부딪히며 살아본 적이 없어서 상대가 뭘 싫어하고 좋아하는지를 모릅니다. 눈을 뜨면 주로 기계와 접하기에 몸은 사람인데 마음의 구조는 기계화되어 버렸습니다. 감정도, 느낌도, 배려하는 것도 없이 짐승처럼 산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황폐되었고, 피폐해졌습니다. 누구도 이것을 못 잡아줍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TV, 게임기, 컴퓨터를 하는 게 생활의 전부이고, 혼자만의 세계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세계를 전혀 모른다 그 말입니다.

    적어도 6.25사변 직후에 태어났던 사람들, 지금 60대 전후, 50대 후반이신 분들은 어디에 던져놔도 삽니다. 육체는 약하지만 정신은 굉장히 강합니다. 그들이 일구어 놓은 게 현재 대한민국 경제입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에서 나온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렇게 부강하게 만들었고, 그 뒤에 사는 젊은 세대들은 그들이 일군 부를 누리기만 하고, 그들의 마음의 세계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의 문제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가 왜 룻을 보아스의 품에 밀어 넣었습니까? 왜 하나님이 내 인생에 실패와 병, 고통과 아픔을 줍니까? 저는 정말 싫었습니다. 제가 운동하다가 허리를 다친 것이 정말 싫었고, 병이 들어 버려져서 길바닥에 뒹굴 때 정말 싫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신 것은 내 영혼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저를 살려 내고 싶으셔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내 마음을 꺾어서 하나님과 연결시키려고 나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고, 문제를 주었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내 영혼을 사랑하셔서 어둠과 사망에서 나를 이끌어 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 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영혼을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셨고, 제 인생도 복되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저는 교만하고, 악하고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잠깐이라도 놓으면 저는 별 짓 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 발목을 잡고 계시기 때문에 교만해지고 싶어도 교만해 질 수 없고 거만해지고 싶어도 거만해 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소 코에 구멍을 뚫습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코뚜레를 끼우고 멍에를 지워 고삐를 묶어놓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큰 소라도 고삐를 당기기만 하면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고삐를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도망을 못 갑니다. 소가 자기 맘대로 가고 싶어 자기 길로 가면 주인이 고삐를 잡아 당겨 아프니까 주인이 끄는 데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고삐를 당겼을 때 소가 그 아픔을 이길 수 있으면 그냥 가겠지만 그걸 못 이기니까 소는 굴복을 하는 거예요.

       

    혈루증에 걸린 여자는 12년 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 일은 불행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제가 22살에 운동하다가 허리를 다친데다 폐결핵에 걸려 가족에게 버림을 받아 길바닥에서 뒹굴었던 그 삶이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었습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교회를 만날 수 있었고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저를 버린 가족에게 한을 품고 독을 품으면서 세상을 원망하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잠자리, 내 먹을 거리 하나 해결 못하는 주제에 생각에서는 모든 사람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무능력하게 앉아있는 제 자신을 봤단 말입니다. 그런 저에게 희진아 교회 가자라는 말이 들려졌을 때 아무 반항 없이 예하고 따라 갈수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의 발치 이불안에 들어가라고 밀어넣는데, 그 자리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저주의 자리고 죽음의 자리이지만 나오미가 볼 때는 축복의 자리이고 생명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보아스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생명을 얻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에스더 성경을 읽어보면 하만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유다인을 진멸하라는 방이 붙었는데 에스더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수산궁에 앉아있는 겁니다. 모르드개는 그런 에스더를 향하여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 지 누가 아느냐라고 말합니다. 그 때 에스더는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에스더가 볼 때는 수산궁을 떠나는 것이 죽음의 자리로 보이지 남편을 만나고 생명을 얻는 자리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에스더도 남편의 부름을 입고 남편의 사랑을 입기를 왜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무엇이 이 에스더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무엇이 에스더의 마음을 수산궁에 묶어놓고 있습니까? 에스더가 알고 있는 나라의 법도가, 에스더의 생각이 에스더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마음을 모르고, 하나님의 마음도 모릅니다. 그런 에스더를 모르드개가 수산궁에서 떠나게 만들고 왕 앞에 나가게 만듭니다. 모르드개가 볼 때는 수산궁이 죽음의 자리이고 저주의 자리이기에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거기서 끄집어내어 살 수 있는 생명의 자리인 아하수에로 왕 앞으로 이끌어 가는 겁니다.

    현재 여러분이 머물고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생각의 자리는 저주의 자리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그 자리가 살 수 있는 자리입니다. 에스더가 수산궁이 안전하고 살 수 있는 곳이라고 여겼듯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생각이 옳고 여러분이 보는 것이 맞다고 여기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자리는 죽음의 자리입니다.

       

    성경 사무엘하 9장의 므비보셋은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피해 살기 위해 다윗에게서 가장 먼 곳으로 피신해서 그 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그 곳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올라 사울의 집에 남은 자들을 왕궁으로 불러들일 때 므비보셋이 왕 앞에 서게 됩니다. 므비보셋은 자기가 숨어 살고 있던 그 곳이 살 수 있는 곳이라고 여겼지만 그 자리는 죽음의 자리입니다. 왜요? 꼴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약속으로 인해그런 그에게 은총을 베풀고 싶어서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이 볼 때는 왕궁이 죽음의 자리로 보입니다. 다윗의 말 한마디에 의해 자기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그런 장소란 말입니다. 다윗의 긍휼과 은혜가 없이는 절대로 그 곳에서 살아 남을 수 없는 저주와 죽음의 자리로 보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장소로 므비보셋을 끌어 들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친구가 강도를 만나 버림을 당했는데, 여행 중에 있는 사마리아인이 언제 그를 만나줍니까? 그 친구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 여리고로 내려갈 때? 강도를 만날 때? 두들겨 맞을 때? 주님은 그 때까지도 쳐다도 보지 않았습니다. 두들겨 맞아 죽음직전까지 갔을 때도 그 친구의 마음에는 기대하는 대상이 있었습니다. 그 길로 내려가고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기대마저 끝나버렸을 때, 아무도 도와 줄 수 없는 누구도 바랄 수 없는 끝이 난 그 자리에 주님은 찾아갑니다.

    폐결핵으로 8가지 합병까지 앓았던 우리 형님에게 요한복음 5장의 말씀이 들려와서 8년 동안 누워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지만 왜 우리에게는 말씀이 살아서 일을 못하는 걸까요? 눈으로 성경을 보고 머리고 이해하고 깨닫지만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와 내 마음을 잡아주지 못하니까 생각에 끌려가고 형편에 끌려가고 사상과 옮음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게 일을 못하니까 내 마음을 잡고 있는 이 세계를 못 이겨 준단 말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라가라는 말씀은 듣고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나는 안 돼, 나는 할 수 없어.’ 라는 생각에 붙잡혀 그냥 주저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 앞에 여러분을 비추어 보십시오. 이사야 557절에서는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기에 하나님은 우리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오라 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26살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허리를 다치고 병에 걸려서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길바닥에서 뒹굴고 상여 집에서 잠을 자는 등 그렇게 버려졌을 때 주님이 제게 찾아오셨습니다. 허리를 다쳐 개처럼 기어다니면서 1분 만에 갈 거리를 두 시간에 걸쳐 기어간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 제가 지금은 멀쩡하게 서있습니다. 그리고 할 거 다 하고 말씀을 전하는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서 있는 박희진은 하나님이 만든 작품인 것입니다.

    룻기 39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룻이 한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이 뜻입니다. 만약 보아스가 룻의 허물을 드러내면 룻은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합니다. 룻에게 보아스의 은혜가 없으면 그 곳에서 절대 자기 발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을 덮습니다.

       

    10절에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도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는 룻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밤중에 외간 남자가 자고 있는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해괴망측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룻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의 힘과 뜻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과 그 힘의 근원이 약속이고 하나님임을 알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룻을 품은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한다. 내가 네 말대로 다 행하리라.” 이것이 바로 룻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어 하는 보아스의 마음입니다.

    은혜 입기를 원하는 룻의 마음과 은혜 베풀기를 원하는 보아스의 마음, 이 두 마음이 만나기 전까지 둘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룻을 보아스에게로 밀어 넣습니다. 보아스의 마음과 룻의 마음이 만나야만 이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만나야만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그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살려주고 싶고, 병을 고쳐주고 싶어서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가셨습니다. 행각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들어와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까? 은혜 입혀 주기를 원하는 주의 마음과 은혜 입고자 하는 마음이 만났을 때 그 말씀이 일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은혜 입는 자리에 가야 합니다.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로드발 암미엘의 집이 아니라 다윗의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게 결정 나는 심판대 앞이 므비모셋이 은혜를 입는 자리입니다. “두려워 마라.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내가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다윗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줍니다. 그 자리에서는 너 왜 도망갔어?”, “왜 그랬어?” 묻지 않습니다. 어떤 죄도 묻지 않습니다. 거기는 다윗이 일방적으로 므비보셋을 품고 받아주고, 용서해주고, 세워주는 자리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에게 일방적으로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 상처를 치료 해 주고, 그를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줍니다. 어디에서요? 버려진 자리, 빼앗긴 자리, 두들겨 맞아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그 자리에 있을 때 말입니다.

     

    보아스의 이불자락 밑에 있었던 룻에게 보아스가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거기는 조건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물에 넣어줄 사람도 없고, 스스로 갈 수도 없는 그 자리에 있을 때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에게 일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입혀준 자리는 어디입니까? 버려졌던 그 자리,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자리에 있었을 때 주님이 찾아와서 일해 줍니다. 썩어서 냄새를 풍기고 있는 그 자리가 주님이 나를 생명의 세계로 불러내줄 수 있는 자리단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느 누구도 썩어 냄새나는 자리, 무덤에 갇혀 있는 그 곳에 있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바로 예수님이 찾아와서 말씀하시고 일해 주시는 자리란 말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그 자리에 못 가게 합니다. 사단은 예수님이 말씀하는 자리 옆에 앉아서 이러쿵저러쿵 이유 달고 변명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자리에 우리를 앉히고 싶어 합니다.

    사람의 도움으로 상에 달려서 지붕위에서 예수님에게 내려오는 그 자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자리, 주님은 오늘도 거기서 나를 이끌어가고 싶어 하십니다.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고 나의 허물을 덮어주고 싶어 하십니다. “당신의 시녀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 주님이 내 허물과 죄를 덮으신다면, 이 세상에 누구보다 내가 가장 옳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허물과 죄를 묻지 않고 나를 덮으시고 받아주신다면 나는 하나님처럼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오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그들이 그 여자를 가운데 세우고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앞에 모든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돌아가고 난 뒤 예수님이 잡혀온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이 여자는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여자는 죄 투성이인데 예수님이 이 여자를 덮어버리니까 문제가 안 되는 겁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허물을 덮어달라고 하기 전에 이미 당신의 보혈로 우리의 허물을 덮어놓으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데, 이 주님의 품을 벗어나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수 밖 에 없습니다.

       

    3: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여기가 의미하는 곳은 사건을 놓고 보면 보아스가 있는 그 잠자리이고 영적으로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이 밤은 이 세상과 이 시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사단이 권세를 잡고 있는 이 어두움의 세상을 사는 동안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 안에 머물러 있으라. 는 말씀인 것입니다. 약속 안이 나의 안식처이며 이 곳만이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유일한 곳이라는 곳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으면서도 생각을 따라가고 형편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 되신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해주고 그를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주막 주인에게 맡기고 떠납니다. 그가 머물러야 할 곳이 주막이고 룻이 머물러야 할 곳이 보아스의 발치이불 밑이듯이 우리들이 머물러야 할 곳은 약속의 말씀안입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에 머물렀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롯은 형편을 따라 요단들로 갔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머물렀습니다. 그가 머무르는 가나안땅은 황막한 들판이었지만 아브라함이 그 약속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신실하게 일하셨고, 25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은 약속대로아브라함을 창대케 하셔서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고 복의 근원을 삼는 기적 같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시편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3 이는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 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7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 이 못하리로다.

    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 로

    10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은 내 방패가 되셔서 내게 찾아오는 수많은 재앙을 막아주시고 나를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국한된 사람에게만 주신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 말씀 안에 머물게 되면 룻이 보아스의 은혜와 복을 입듯이, 므비보셋이 다윗의 복을 입듯이,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복을 입듯이, 여러분도 은혜 입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말씀과 여러분 마음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믿은 믿음으로 말씀 안에서 쉼과 복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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