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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선 | 2017.02.05 13:14 | 조회 3635


    1. 말씀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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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25일 주일 오전말씀

    사무엘하 201~3,14~22

     

    말씀과 생각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복음을 듣고 말씀을 믿는 분도 계실 거고 안타깝게도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죄가 없어진 사실을 부정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손발은 한 번도 여러분을 거부한 적이 없을 겁니다. 밥을 드실 때에 , 오늘 기분 나빠서 손 안 움직일 거야.” 하고 여러분 손이 숟가락을 안 잡은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일어나 걸어가고 싶은데 나는 오늘 기분 나빠서 너하고 함께 안 갈 거야.” 하고 발이 안 움직인 적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실수를 해서 물건을 떨어트려 발가락이 시커멓게 멍이 들어도 멍든 발가락은 아파하면서도 여러분 걸을 때 절뚝거리며 걸어갑니다. 발은 한 번도 불평하지 아니하고 여러분의 말에 순종하며 여러분 움직일 때마다 움직였을 겁니다. 아마 여러분 몸에 신체부위는 여러분이 병이 들어서 사고를 당해서 팔이 부러지거나 다리를 부러지기 전까지는 움직일 겁니다. 그래서 이 신체의 부위는 여러분하고 하나가 돼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안 될까요? 앉아서 성경을 펴놓고 이야기 해보면 다 하나가 된 것처럼 신령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삶과 행동을 보면 , 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 맞아?” 할 정도로 형식적인 주일 낮 예배를 드리러 다니지 하나님과 마음이 연결된 삶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말에서 말씀이 묻어나오거나 말씀 앞에 자신을 돌아보고 깨트려진 자신의 악을 고발한 얘기를 들어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정말 내가 교회 안에 이렇게 살았다. 내가 정말 교회를 어둡게 만들었다. 내가 교회를 불신하게 만들었고 내가 장년회 모임을 흩트렸다. 내가 이렇게 살면서 모든 장년들이 나 때문에 예배를 참석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나쁜 놈이다. 그런 말도 할 법도 한데 아무도 안합니다. 그렇게 살아도 본인은 전혀 가책 없이 사십니다. ? 말씀과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그게 잘못된 것도, 악한 것도 전혀 모른다 그 말입니다.

     

    제가 83년도에 대구에 신학교를 들어갔을 때 늘 예배당에 와보면 여기저기 구서구석 앉아서 성경 보는 사람 기도하는 팀, 교제하는 팀, 누가 이야기 안 해도 그렇게 살았던 시절이 있습니다. 지금은 평일에 예배당 올라와 보면 썰렁합니다. 제가 광주 온 지 3년이 넘었는데 신앙이 어렵고 안 되는 문제를 놓고 저를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제가 부르면 얼굴이 창백해가지고 찾아옵니다. 당황해 합니다. ? 찍혔구나. 본인은 신앙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러면 굉장히 당황스러워 해요. 본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일하기에 불편하고 일할 수 없는 다른 마음이 있는데 그걸 모르는 겁니다옛말에 허허 해도 빚이 천 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표현을 잘 해놓았는지... 성경이야기를 해도 속에서는 부대끼는 겁니다. 말씀 앞에 당신의 마음을 비춰보면 말씀과 너무 다른 겁니다. 그러니까 말은 못하고 혼자서 성경을 파고 뒤적이지만 답이 안 나와요. 그런데 차마 그 마음을 들고 자기 부족하고, 연약한 것을 내놓고 싶어도 그걸 못해요. ? 마귀가 그 사람을 하도 많이 높여놔서 그걸 못하게 만듭니다. 남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본인 혼자서만 본인이 신령한 줄 알고 본인 혼자서만 교회 안에서 신앙 잘하는 줄 압니다. 본인이 교회 안에서 살아왔던 본인의 의지와 행위와 노력과 수고로 본인 신앙을 그렇게 측정합니다. 그것만큼 악한 것이 없습니다.

     

    어제 장년회를 하면서 믿음과 의지의 차이가 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로 말미암아 사는 삶이 있고, 내 의지로 사는 삶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로 말미암은 삶이 믿음이고 내 의지로 사는 것은 행위이고 율법입니다.

    제가 살던 합천에는 물살이 굉장히 센 강이 있습니다. 그 강을 가끔씩 어른과 아이가 함께 건너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가 7살이라고 합시다. 아이는 아버지 손에 쥐가 날 정도로 아버지 손을 꽉 붙잡고 강을 건너갑니다. 그런데 아이가 버티는 힘과 물이 때리는 힘이 싸우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 손의 힘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아이는 자기가 아버지 손을 놓으면 떠내려가서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아이 혼자의 힘으로는 강한 물살을 버틸 수 없어서 결국엔 힘이 빠져 아버지 손을 놓게 되고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는다면 아이가 기진맥진할지라도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놓지 않으면 아이는 강물을 건너갈 수 있습니다.

    아이가 아버지 손을 잡는 것은 내 의지를 말하고,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는 것은 아버지의 의지로 아이를 강을 건너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잡고 계신다면 강물처럼 수많은 세상의 풍파와 어려움이 찾아올 때 나는 이기지 못하고 휩쓸리고 떠내려가는 유혹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나를 잡고 있는 주님이 나를 문제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가 말씀을 이루려고 한다면 얼마 안가서 신앙에 환멸을 느끼고 괴롭고 힘들어하다가 못하겠다고 그만둡니다. ? 겉으로 볼 때는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그래야 되겠다. 마음을 꺾어야겠다. 교제를 해야겠다. 내가 믿음으로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전부다 의지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까? 마음 꺾을 수 있습니까? 교회와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습니까? 천만에요. 사탄에게 속아서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살 수 없는 내 인생에 하나님이 마음을 넣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믿음으로 못 삽니다.

     

    사람은 감정의 세계와 영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마음에서 일어나는 혼의 세계를 영적이라고 믿고 막 뛰어다니다가 엎어져서 아무 것도 못합니다. 사단은 지금 여러분 마음에 믿음이 아닌 혼의 세계를 부추겨서 감정과 형편에 따라 여러분이 요동하고 움직이도록 이끌어 갈 겁니다. 말씀을 대하면 말씀 속에서 자신에게 있는 죄를 발견합니다. 여러분, 병원에 와서 의사를 만나 이야기를 하면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 합니다. 몸이 안 좋은 이야기만 듣습니다. 내가 전혀 몰랐던 몸 안의 문제와 병들을 찾아서 고쳐줍니다. 그러면 건강해 집니다. 너무 좋은 건데 그 순간은 싫은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에게는 정확하게 마음의 상태를 성경이 가르쳐 줍니다. 그게 싫으니까 성경을 그냥 대충 읽습니다.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사무엘하20:1]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다. 분의가 무엇입니까? 이새의 아들과 함께할 업이 없다. 업이 뭡니까? 비슷한 이야기를 사무엘하 15장에 압살롬이 아버지 앞으로 나가는 백성들을 불러놓고 아버지는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다. 내가 이야기 해 줄게.”라며 4년 동안 왕을 향해 가는 백성들을 끌어 모아 자기가 교제를 해 줬습니다. 그리고 전부 압살롬을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4년 뒤 헤브론에 가서 반란을 일으키고 왕권을 잡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여기 세바라는 친구가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다고 백성들의 마음을 전부 자기를 쫓게 만들어 버립니다. ‘교회와 함께할 마음이 없어. 우리 교회는 이래서 문제야. 우리 교회는 복음은 좋은데 일이 너무 많아. 그래서 싫어.’ 이것은 분의가 없다는 이야기와 똑같은 말입니다. ‘우리 교회 목사는 너무 까다로워.’ 이건 이새 아들과 함께할 업이 없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음에 이끌려 살다가 그게 모자라 나중에는 밖으로 표출하고 주변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아서 선동하고, 모임을 떠나게 만듭니다.

    교회 안에서 오래되신 분이 처음부터 주일 낮 예배만 드리고 안 나오니까 다른 사람이 따라서 안 나옵니다. 주일 저녁 예배가 되면 낮 예배의 3분의 1도 안 나옵니다. 세상에 이렇게 썩어도 아무도 모릅니다. 본인들은 신앙을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안 듣고, 성경 안 보고 어떻게 신앙합니까? 교제 없이, 마음 없이 신앙을 할 수 있습니까? 이야기해 보면 마음에 말씀이 없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귀로 듣고, 지식을 쌓는데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10년 전, 20년 전 내 마음 그대로입니다.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세바가 반란을 일으키고 백성들 마음을 다 끌어모아 왕을 불신하고 대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아비새 성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성 안에 장로, 서기관, 바리새인, 아저씨, 할머니 등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세바를 잡으려고 요압이 군사를 끌고 와서 아비새 성 밖에 토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성 안에 있는 여자가 그것을 보고 놀라서 군대장관 요압과 독대를 합니다. “왜 이스라엘의 기업과 같은 이 성을 무너뜨리려고 일을 합니까?”, “이 기업을 삼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 성 안에 다윗을 대적하는 아주 나쁜 놈, 세바가 있어서 세바를 잡으려고 보니 성을 쌓아서 잡으려고 한다.” “그러면 내가 그 세바를 잡아주면 그만 하겠네요?” “그렇지.” 지혜로운 여자가 성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세바를 잡자고 합니다.

     

    요압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행하여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저를 따르더라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 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외쳐 가로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컨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가로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대답하되 그러하다 여인이 저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사무엘하20:14~19]

     

    하나님의 기업인 이 성을 무너뜨리고 삼키려는 것은 선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20.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함이 아니니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저만 내어 주면 내가 이 성읍에서 떠나가리라 성 안에 다윗 왕을 대적한 세바만 내 놓으면 돌아가겠다는 말입니다. 요압이 와서 토성을 쌓고 성을 무너뜨려서 세바를 잡으려는 것은, 이 성이 잘못 되어서가 아니라 성 안에 들어와서는 안 될 다윗 왕을 대적하는 세바를 잡아 없애기 위한 거 맞지요?

    이 이야기를 우리 시대로 끌고 오겠습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했는데 유일하게 사람을 만들 때 직접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서 생령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속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서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만든 하나님의 기업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인간을 심판하시고 쫓아내야 합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에 들어와서는 안 될 죄가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인간을 추방하고 버려야 합니다. 로마서 6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간음 살인 도둑질이라고 그렇게 배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떠난 것을 보고 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1:28~32]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과 내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썩어질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 말씀과 바꿨습니다. 여러분 손에 들려 있는 그 말씀을 여러분 마음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말씀이 내 마음을 못 다스려져 줍니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어서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여러분 마음에 성경 한 말씀이라도 두고 사신다면 그 말씀은 여러분 마음에 찾아오는 의심을 막아주고 불신을 막아주고 재앙을 막아주고 여러분 삶을 복되게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저는 수십 년 동안 살았지만 제 마음에 죄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저는 죄 사함을 받았다 했지만 제 자신의 소리를 듣고 제 옳음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런 저를 위해서 하나님의 종은 참 많이 싸워주셨고 부딪쳐 주시면서 내 안에 있는 죄를 적발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믿지 않는 악한 내 마음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성경으로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하고 귀신을 쫓아 낼 수 있었지만은 그 말씀은 내 안에 나를 지켜줄 수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믿지 않는 게 죕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믿으신다면 마음에 말씀이 있는 것이 즐겁고 감사할 겁니다. 말씀이 마음에 없을 때 괴로워할 것입니다.

    요압에게 아벨성 안에 세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들은 세바를 찾아냅니다. 그 전까지는 있어도 그가 왕을 거스르는 대적자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요압의 말을 듣고 보니까 그렇구나! 이놈을 잡아내야 하는구나하고 잡아내는 겁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말씀을 버리고 짓밟는 죄가 들어와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7:14~25]

     

    내 속 곧 내 마음에 선이 거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것을 아신다면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려고 애 쓰지 않습니다. 마음 꺾으려고도 복음 전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속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논리 속에서 내가 믿음으로 살면 된다는 생각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사탄이 교묘하게 속여서 의지로 끌고 갑니다. 갈라디아서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여러분은 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판단도 하고 분별도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가 뭘 합니까? 여러분은 그 말씀을 안 믿습니다. 믿는다면 거기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우리 형제가 저 따라 아프리카 갔다가 먼저 들어 왔습니다. 카메룬에서 가봉을 경유하여 에티오피아까지 와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를 타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봉에서 비행기에서 내리라고 하더랍니다. 그 비행기가 다시 오니까 짐을 놔두고 내려도 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여권과 짐을 놔두고 내렸다가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어찌어찌해서 가봉에서 에티오피아까지 보내줬지만 에티오피아에서는 여권이 없다고 절대로 한국으로 안 보내줬습니다. 그래서 대사관에 연락해서 가까스로 임시여권을 받고 한국에 들어왔다 합니다. 이 형제가 보내달라고 아무리 애걸복걸해도, 아무리 변명하고 설명해도 여권이 없으면 안 보내줍니다. 낡아도 여권만 있으면 한국에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는 신앙도 그렇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내 속에 선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권이 없는 형제가, 새 여권이 올 때까지는 절대로 한국에 들어올 수 없듯이 내 속에 선이 없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내 속에 죄가 있습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 안에 다른 놈이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7:18~20]

     

    아하, 내 속에 이 죄란 놈이 숨어서 나를 속였구나. 나는 내가 선하게 살려고 각오하고 결심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죄가 나를 이렇게 살도록 의지와 각오, 결심을 주었구나. 내가 속았구나.’ 이것이 발견되면 자기를 믿지 않습니다. 죄는 내가 믿음으로 살 수 있다고 속였고 내가 마음 꺾을 수 있다고 속였습니다. 내가 신앙도 잘 할 수 있다고 속였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셔야 합니다. ‘나는 선을 행하기를 바라고 믿었는데 내 속에 선이 없네. 그럼 내가 왜 선을 행하려고 했지? 이놈이 죄네. 이 죄가 나를 선하게 살자고 가르치고 결심하게 만드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내 안에 있는 죄의 법이 나를 죄를 짓도록, 원함의 삶을 살도록, 각오하고 결심하도록 끌고 가니까 나는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것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내가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것 때문에 고통하고 괴로워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다가 벗어나는 이야기가 로마서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거짓되다. 행악의 종자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거짓된 내가 어떻게 선하게 살며 행악의 종자가 어떻게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안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사단에게 속습니다아무도 아벨성안에 있는 세바를 몰랐습니다.

    아하 이것 때문에 속았구나더러운 박희진이놈이 성경을 깨닫게 하고 일을 하게 했구나. 내가 속았구나.’ 하나님은 저한테 그걸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내가 마음이 어렵고 내가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힘들어하는 박희진은 박희진이 아니고 마귀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받아들이니까 이 박희진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게 누구입니까? 선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느끼고 감각하는 건 내가 아니라 마귀가 박희진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갈라디아서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이 말씀을 보면 나는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 말씀만이 살아서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도 내 생각과 내 각오, 내 결심을 따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 사람은 철두철미하게 마귀에게 속아 있는 사람입니다. 찾아드리겠습니다. 그 부분을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요한복음 13:2]

     

    마귀가 가룟 유다 마음에 예수 팔려는 생각을 넣어주었다고 했지요? 유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되었을 때는 예수를 팔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귀가 유다 마음에 예수 팔려는 생각을 넣어줬는데 유다는 그것을 모르니까 그 생각 그대로 받아들인 겁니다. 생각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생각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들으며 그 생각에 분명하고 옳으니까 행하는 겁니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 하라고 해도 안 합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태복음 27:3~5]

     

    유다는 예수를 팔고 난 뒤, 예수님이 끌려다니면서 심문 받고 채찍에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뉘우치고 괴로워하다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찾아갑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습니다.”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있냐? 네가 당해라.” 그 사람들이 안 받아줬습니다. 유다는 너무너무 괴로워서 그 은을 성소에 던져놓고 물러가서 자살을 합니다. 유다는 철두철미하게 마귀에게 속고 또 속았습니다. 은 삼십 냥에 예수를 판 것도 속은 거지만 예수를 판 후에 뉘우친 것도, 제사장을 찾아간 것도, 물려달라고 하는 것도 속은 것입니다. 괴로워하는 것도 속은 것이고 스스로 목매어 죽은 것도 속은 것입니다. 제대로 뉘우친다면 주님을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얘기를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다 버릴지언정 나 베드로는 주님 안 버립니다.” 베드로의 말에 주님은 닭 울기 전에 네가 3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주님.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베드로였습니다. 그 베드로가 어떻게 하는지 찾아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마태복음 26:69~74]

     

    75절은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세 번을 부인하고도 자신이 예수를 부인한지 몰랐습니다. 그러다 닭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는. 베드로의 마음이 주님의 말씀과 연결되면서 내가 틀렸고 주님이 맞네. 나는 정말 부인하지 않으려고 각오했는데 나는 돌아서서 지금 부인하고 있네. 틀렸네.’ 하고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부인한 놈이구나. 주님이 맞구나.’ 그리고는 예수님과 연결된 베드로는 벗어납니다. 생각에 잡힌 유다는 결국 생각에 끌려서 목을 매달아 죽지만 예수님과 연결된 베드로는 벗어난 것입니다.

    성 안에 세바가 숨어있는데 아무도 모르지만 요압의 말을 들은 여자가 세바의 목을 잘라냅니다. 내 속에 다윗을 대적하고 다윗과 함께 할 분의가 없다는 세바처럼 말씀을 거역하고 교회를 거스르는 악한 마음이 있어도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성 안에 있는 여인이 요압의 말을 듣고 성에 들어온 세바를 발견하여 그의 목을 잘라내듯이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그것을 찾아냅니다. 세바의 목을 잘라낼 때 성이 보존되는 것처럼, 말씀이 내 안에 있는 악을 드러내어서 하나님 앞에 새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내 안에 교회를 거스르고 복음을 거스르며 말씀을 거스르는 세바와 같은 악이 나와 함께 살아도 나는 모르지만 말씀을 이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싫어하시기 때문에 이것을 잘라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은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나를 쪼개서 새 삶을 살게 만들어주실 겁니다.

     

    아벨성 안의 여인이 요압의 말을 받아들이면서 세바가 보인 것처럼 내 마음으로 살 때는 안 보였지만 말씀을 가지고 보면 내 안의 세바가 보입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으로 살 때는 내가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는데 말씀 앞에 나를 비추면 내가 너무 잘못된 것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냐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껏 모르고 살았지만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 마음에 있는 세바를 잘라낼 것입니다. 세바를 잘라낼 때 성이 보존되는 것처럼 내 마음에 숨어 있는 세바를 잘라낼 때 우리가 주님 앞에 은혜의 새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들려오는 요압의 소리를 듣고 그 말씀 앞에 나를 비추면서 거짓되고 잘못된 마음을 도려낸다면 성령이 힘 있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세바의 목을 잘라내어 성이 보존되듯이 주님 안에서 그 은혜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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