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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선 | 2017.02.19 12:19 | 조회 4122


    1. 말씀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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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19. 주일 오전예배

     

    창세기 4713~26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식물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쇠약하니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몰수히 거두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오니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진한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가로되 돈이 진하였사오니 우리에게 식물을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요셉이 가로되 너희의 짐승을 내라 돈이 진하였은즉 내가 너희의 짐승과 바꾸어 주리라 그들이 그 짐승을 요셉에게 끌어 오는지라 요셉이 그 말과 양떼와 소떼와 나귀를 받고 그들에게 식물을 주되 곧 그 모든 짐승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식물로 그들을 기르니라 그 해가 다하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고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짐승 떼가 주께로 돌아 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전지뿐이라 우리가 어찌 우리의 전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식물로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고 전지도 황폐치 아니하리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 전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드리니 애굽 사람이 기근에 몰려서 각기 전지를 팖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요셉이 애굽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제사장의 전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의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 전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날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전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추수의 오분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사분은 너희가 취하여 전지의 종자도 삼고 너희의 양식도 삼고 너희 집 사람과 어린 아이의 양식도 삼으라 그들이 가로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까지 이르니라

     

    오늘 읽었던 말씀은 애굽 백성들이 기근으로 죽어가다가 살아난 이야기가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책을 들고 다니고 성경으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가 낫는다고 해서 그 교회가 성경적인 하나님의 교회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 성경적인 교회는 성경이야기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자기가 깨달은 논리를 펼치는 게 아니고 말씀 그대로를 이야기합니다.

     

    , 성경에 뭐라 기록되어 있습니까? 모든 종교에서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자로 오셨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가져갔다고 가르칩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가져갔다, 인류의 구원자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세상 죄를 가져가고 죄가 없다고 말은 하는데, 참 많은 교회에서 죄가 있다고 가르치고 그 죄를 우리가 용서받기 위해서 회개를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를 믿으면 의롭게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가져갔다고 돼 있습니다. 인류의 시작부터 종말까지를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끝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213절에 보면, 말씀이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기독교라는 종교단체 안에서는 이 말씀을 뒤집는 다른 교리가 나옵니까? “지금 내가 죄를 짓고 있잖아.” 그 사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펴놓고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죄가 뭔지를 모르니까 짓는 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합니다. 참 어리석습니다. 성경을 안 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안 읽어요.

     

    목사님께서 해외 봉사 나가는 굿뉴스코 학생들을 향하여 자주 하시는 말씀이 성경을 읽어라.”입니다. 학생들이 해외 나가기 전에 훈련받을 때, 일주일 동안 합숙하면서 훈련을 했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학생들에게 신구약을 한번 다 읽어보라고 합니다. 교사들도 같이 읽습니다. 그럼 학생들은 잠이 오니까 성경책 들고 추운 겨울에 창문 열어놓고 서서 담요 뒤집어쓰고 걸어 다니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금요일쯤 되면 성경 다 읽은 친구가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그들을 보고 목사님께서 하루에 10시간씩 성경을 읽으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못 읽어도 5시간은 성경을 읽으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분 5시간은 누구나 다 읽을 수 있습니다. 10시간씩 성경 읽는 사람은 일주일에 신구약 한 번 다 읽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읽으면 1년이면 50번 읽습니다. 1년에 신구약 20번만 읽어도 성경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 친구는 말씀에 푹 젖어서 행복한 시간들을 보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친구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어와도 말씀이 이미 그 사람을 딱 잡고 있어서 생각이 그 마음을 끌고 가지 못 합니다.

     

    오늘 읽었던 말씀은 창세기 47장입니다. 요셉의 말을 믿고 요셉이 시킨 대로 곡간을 만들었던 바로는 기근이 와도 그 기근 때문에 염려하거나 양식 사러가지 않습니다. 41장에서부터 어디를 읽어봐도 바로가 양식이 없는 것 때문에, 가족들 먹을 것 때문에 걱정하고 어려워하는 게 한군데도 기록 돼 있지 않습니다. 요셉이 양식을 팔든가 뭐하든가 관심도 없고요, 많이 퍼주든 적게 퍼주든 거기 곡간에는 양식이 바닥이 안 납니다. 7년 풍년 동안에 요셉의 곡간이나 바로의 신하들의 곡간에도 똑같이 양식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7년 풍년이 끝나고 기근이 찾아오니까 너무 달라지는 겁니다. 기근이 찾아와도 요셉의 곡간에는 여전히 양식이 있는데 바로의 신하들이 만든 곡간에는 양식이 바닥이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4713절을 한 번 펴 보십시오.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식물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쇠약하니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몰수히 거두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오니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진한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가로되 돈이 진하였사오니 우리에게 식물을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똑같이 곡간 만들었습니다. 맞지요? 그런데 사람들의 곡간에 있는 양식이 왜 바닥이 납니까? 왜 우리 마음에 어려움이 찾아옵니까? 기근이 애굽 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요셉이 지배하고 있는 영역에는 기근이 일을 못합니다. 요셉에게 속해 있는 바로가 기근 때문에 어려워하지 아니하고, 바로와 함께 사는 가족들도 기근 때문에 어려워하지 아니하고, 그들은 기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그냥 똑같이 풍년처럼 삽니다. 그런데 그 나머지 바로의 신하들-자기가 곡간을 만든 사람들은 기근이 오니까 곡간에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는 가을 추수 해놓고 걱정을 했습니다. 가을에 추수하면 볏가마니가 마당에 쌓이는데 한 열흘 지나면 볏가마니가 다 없어져요. 지난 한 해 동안 먹고 살기 위해 여기저기서 빌려 먹었던 양식들을 다 갚아주고 나면 남은 볏가마니가 없는 겁니다. 씨알 나락만 몇 개 남아가지고 한 구석에 쳐 박아놔요. 그 때부터 칡뿌리 캐러 다녀야 되고요, 쑥 뜯고 도토리 주우러 다녀야 되었습니다. 뼈 빠지게 농사지어 가지고 가을에 전부 다 갚아주고 다음 추수 때까지 또 빌려 먹습니다. 그런 삶이 계속 반복되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저도 괴로웠는데 어른들은 더 힘들었겠죠. 그랬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마 그때보다 더 힘들었으니까 양식을 사러 갔겠죠. 나중에는 그것도 보자라 몸까지 팔았습니다. 내가 겪은 보릿고개와는 비교가 안 되는구나. 성경에 이들은 곳간을 만들어 7년 동안 똑같이 곡식을 모아두었는데, 이유가 뭘까? 이 곡간은 왜 바닥이 나고 요셉의 곡간은 왜 바닥나지 않을까? 나는 교회 다녀도 늘 어렵고 힘든데 왜 우리 목사님은 맨날 웃고 다니지? 나는 뭘 하든 다 어렵고 안 되는데 우리 선교회 안에 목사님들은 전부 잘 되지? 이유가 뭘까? 사람들은 그걸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릅니다. 그냥 나 믿습니다.’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마음이 바뀌기 전까지는, 옮겨지기 전까지는 불가능합니다. 그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돈을 가지고 와서 양식을 샀을까?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양식이 바닥났을 때 왜 짐승을 데리고 와서 양식과 바꿨을까요? 세 번째 왜 이들은 자기 땅과 몸을 팔아야 했을까요? 마지막에 땅과 몸을 팔았을 때 이들에게 양식이 아니라 종자가 옵니다. 47장에서 이들은 식물을 구하러 갑니다. 양식을 구하러 갑니다. 42장에 가나안에 있는 야곱도 아들을 보내서 양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양식을 사왔는데 바닥이 나서 또 사러 가고, 또 바닥나고. 야곱은 가나안에서 기근과 싸워서 버티려고 일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양식을 팔고 있는 요셉은 가나안에서 내려온 형들을 보고 고리를 걸어 애굽으로 이들을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형들은 양식을 사다가 가나안에 갖다 놓고 가나안에 살려고 하지만 요셉은 어쨌든 형들과 아버지 전부 애굽으로 끌고 오려고 합니다. 둘의 싸움이 있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성경 47장에도 두 개의 강한 힘이 싸우고 있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일하고 있는 하나님의 힘이 있고, 신하들을 통해 일하고 있는 사단의 힘이 있습니다. ‘너 어렵잖아, 힘들잖아, 배고프잖아, 그러니까 네가 모은 돈으로 양식 사오면 네가 살 수 있어.’ 그래서 양식을 사러 갑니다.

     

    15절에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진한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가로되 돈이 진하였사오니 우리에게 식물을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우리에게 식물을 주소서. 양식을 사러 왔다.”라는 이야기가 쉽겠습니까? 여러분 아들, 딸 결혼을 시켜야하는데 가정이 어려워서 돈을 빌리러 가면 누가 기다렸다는 듯이 돈을 줍니까? 돈을 빌리러 가면 마음이 굉장히 어렵겠죠? 그래도 자식을 사랑하니까, 결혼 시켜야 하니까 돈을 빌려서 혼사를 치르려고 가족들 찾아다니면서 오만 소리 다 들어가며 결혼시키는 엄마들이 있습니다. 그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들이 요셉에게 와서 양식을 구합니다. 내 돈 주고 양식을 사 먹는데도 마음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 겁니다. 여러분 내가 돈 주고 산 이 양식이 1년 뒤에 바닥이 난다는 것을 알면 그 짓 안하겠죠. 그 방법 안 쓰죠.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기근을 주고 어려움을 줬을까? 왜 배고픔을 줬을까? 이유가 뭐지?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들이 기근을 만나면서 기근을 준 하나님을 찾아가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로 인간의 방법으로 쓰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다 먹고 살려고 하는 것처럼 말씀 몇 마디 듣고 위로 받아서 살려고 몸부림치지 왜 나를 어렵게 하셨는지, 왜 내게 문제를 주셨는지, 아픔을 주셨는지, 그 문제를 들고 하나님을 찾아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삶을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 삶이 연속되고 어려움을 겪고 1, 2년만 지나가는 것뿐입니다. 왜 하나님이 문제를 주셨는지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형들과 아버지를 애굽으로 끌어다 놓습니다. 양식이 있는 애굽으로. 그래야 산다 이 말입니다. ‘저 형들의 자루가 터지도록 양식을 가지고 가지만 1년 뒤에 배고파 죽어. 여기 와야 돼. 거기로 가면 안 돼. 이리 와. 내가 요셉이야.’ 요셉이 아버지가 잘 살아 계시냐, 건강하시냐고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형제가 몇이냐, 막내는 있냐 없냐. 이 정도 되면 눈치 챌 만도 한데 얼마나 멍청한지 모릅니다. 한 번쯤은 당신 누군데요?’ 이렇게 물어보면 되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싸움은 무엇이냐. 백성들이 자신이 모아놓은 것을 가지고 기근을 버텨보려고 하는데 기근이 너무 심하니까 양식이 바닥이 났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나 양식으로는 도저히 기근을 버틸만한 힘이 없어서 제 2의 방법으로 택한 것이 양식을 사다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식을 줍니다. 얼마나 줬는지 모르겠지만 짜게 줬을 것입니다. “너 그래가지고 안 돼. 그 양식 가지고 가면 살 줄 알아? 해봐.”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 약속을 받고 갈대아 우르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려고 아브라함이 애를 씁니다. “하나님, 아 다메섹 엘리에셀이 내 대를 이으면 안 됩니까?” “아니야. 네 몸에서 날 자라야 돼.” 그때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늘의 별을 세어봐라. 네 자손이 저 별보다 많을 것이다.” 그런데 기다려도 안 되니까 아브라함이 이번에는 하갈을 취합니다. “여보, 하나님이 우리에게 씨를 준다고 했는데 나는 너무 늙었어. 저 하갈을 취해서 자식을 낳아. 그래도 당신 씨니까 누가 낳든 상관있겠어?”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갈을 취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듣고 갈대아 우르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고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는 25년이 걸립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으매 하나님이 그 믿음을 따라 일을 시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말씀에다가 자신의 가능성과 옳음, 판단, 방법을 섞고 생각을 섞었습니다. 그런데도 안 되는 겁니다. 별 것 다 해봤는데 안 되니까 그제야 하나님, 해주세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말고는 믿을 데가 없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일을 하셔서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납니다.

     

    47장에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서 이 애굽 백성들을 이끌어 가고자 하는 길이 있고 백성들이 자기들의 생각과 지혜를 가지고 양식 사와서 기근을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거 안 돼. 가나안에 있는 우리 가족들도 여기 와서 다 살잖아. 나한테 속해야 돼.” 이게 요셉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애굽 백성들처럼 말씀만 가지고 내가 그 말씀을 어떻게 하려고 하고 내 방법대로 살려고 합니다. 말씀을 깨달아서 내 인생을 내가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돈으로 양식을 사가지고 가도 그 양식으로는 안 됩니다. 또 이제 돈이 없으니까 짐승 가지고 와서 양식을 사가면 1년 뒤에 또 바닥이 납니다. “돈도 짐승도 없고 이제 땅과 내 몸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럼 네 땅 가지고 와. 네 몸도 가져오고.” 땅 다 팔고 몸까지 다 팔고 나니까 그때서야 요셉이 양식이 아닌 종자를 줍니다. “이거 가져가서 땅에다가 심고 수확을 해서 그 소출로 종자도 삼고 양식도 삼아라.” 애굽 전역은 다 바로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이들은 더 이상 자기가 양식을 사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들에게 자기 것이 있는 동안에는 양식을 사다가 그걸로 버티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게 끝날 때 이들에게 새롭게 사는 방법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7장에 사마리아 성이 아람군대에 에워싸여서 성 안에 굉장히 큰 굶주림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서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성안의 사람들은 아람군대가 에워싸니까 성문을 딱 닫아놓고 그 안에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이 제일 큰 문제인데, 성문을 닫아 버리니까 시간이 지나갈수록 양식은 계속 줄어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는데도 믿지 않으니까 오직 성 안에서 버티면서 몸부림치며 양식 구하러 비둘기 똥 줍는 겁니다. 그러나 성 밖으로 나가야 하나님이 아람진에 가득 쌓아놓은 양식을 취해서 그것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비둘기 똥이나 나귀 머리를 구하러 다니는 수고와 어리석은 삶을 끝을 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성을 뛰쳐나오면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양식을 누리고 먹고 취하고 얻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도 아들과 함께 통에 남아 있는 마지막 가루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를 보고 엘리야가 물을 좀 달라고 합니다. 물을 가지러 가는 여자에게 물을 가지고 올 때 떡도 조금 가지고 오라.”라고 말합니다. “떡은 없고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인데 이것으로 내 아들과 함께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미안하다고 하지 않고 먼저 나를 위하여 떡 한 조각을 만들어 가져오고 그 후에 네 말대로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떡을 만들어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이 땅에 비를 내리는 그날까지 네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이 가루와 기름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의 종을 위해서 떡을 만들라는구나. 그리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 비를 내리는 그날까지 내 통에 가루는 절대로 바닥이 안 나는구나. 내 병의 기름은 절대로 바닥이 안 나는 구나. 그러면 나는 죽을 일이 없겠네.’ 이 사실을 발견한 여자는 하나님의 종의 말씀대로 합니다. 그런데 진짜 통에 가루가 채워지고 병에 기름이 채워져서 퍼내도 퍼내도 채워졌습니다.

     

    저는 1981년도 82일 구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집도 없었고 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제 몸은 병신이었고 피를 토하면서 방바닥에 뒹굴고 살고 있었습니다. 늦은 가을에 잠잘 곳이 없어서 짚동 사이에 들어가서 추위를 견디다가 날밤을 새우고, 이른 아침에 햇빛이 비치면 햇빛 비치는 딱딱한 곳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밤이 되면 다시 추위와 싸우고... 그렇게 살던 저에게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제 인생을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저희 형님의 병이 나았던 똑같은 말씀으로 제 병을 치료해 주시고 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제 인생에 새로운 삶을 계속 주시면서 모든 걸 주셨습니다. 잠언에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소서. 참 신비로운 것은 하나님은 제 인생을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제 인생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몸 하나 들고 주님 앞에 나갔는데 그때부터 주님은 내 병든 몸을 바꿔버리고 부정적인 마음 바꾸고 다 바꿔서 퍼낼 때마다 채워 주시는 겁니다. 내 마음의 것을 내놓는 만큼 주님이 더 많은 걸 주십니다.

     

    이 여자도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법이 틀렸구나. 이 방법으로 살면 망하는 거구나. 굶주리는 거구나. 어렵게 사는구나. 이거는 바닥이 날 수밖에 없는 인생이구나. 내가 왜 그렇게 살았지? 하나님을 왜 내가 안 믿었지?’ 그렇게 삶이 바뀌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 여자가 통에 가루를 퍼낼 때 퍼내는 만큼 줄어들었는데, 지금부터는 퍼내도 퍼내도 줄지를 않고 그대로였습니다. 열 번 퍼내는 거보다 만 번이 훨씬 낫고 만 명이 먹고 사니까 퍼내는 게 너무 재밌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통에 있는 것을 퍼가지고 누구를 주면 그 사람이 배고파 죽어가다가도 살아나서 고마워할 것입니다. 그 여자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혼자 고마움을 다 차지하는 겁니다.

    요셉의 곡간도 애굽의 모든 백성이 다 먹어도 양식이 안 떨어지는 곡간입니다. 양식을 아무리 퍼내고 퍼내도 양식이 줄지 않으니까 애굽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다 먹고 사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인생을 맡겨 버리니까 바로 가정뿐만 아니라 애굽 전체가 행복하게 살듯이 우리도 내 곡간 버리고 하나님의 곡간 안에 같이 들어와 살라는 것입니다. “네 방법, 네 지혜 다 버리고 나 좀 믿어봐. 바로가 나 믿으니까 내가 복되게 해 주잖아. 고생고생하며 돈 떨어지고, 짐승을 팔고 결국에는 자기 몸까지 팔아서 겨우 사는 것 말고 바로처럼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 있어. 그런데 너 왜 어리석게 신하들처럼 살려고 해? 왜 어리석게 고생하며 살라고 해?” 이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끌어주시려고 오늘도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은 바로 여러분 마음에 말씀을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1949~51절 말씀 읽어드리겠습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시편 11949~51]

    여기 49절 말씀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이걸 여러분에게 물어보면,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들으셨고 마음에 어떤 말씀을 두셨습니까? 이가 바로였다면, 바로가 요셉을 통해 들은 말씀은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치리하게 하소서.”였습니다. 그 말씀대로, 바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이 요셉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를 택하여 애굽을 치리하는 치리자로 세웠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기근을 줬지만 요셉의 다스림 속에 들어가서 요셉을 통해서 기근을 막아낸 것입니다. 이게 바로의 지혜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 마음에 두어서 그 말씀대로 바로는 정권을 바꿨습니다.

     

    그 다음, 50절 말씀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내가 어렵고 힘들 때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유일한 이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나를 살렸다고 했습니다. 시편 107편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서 저희를 고치고 위경에서 건져낸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말씀을 가진 요셉을 보내서 애굽을 건져내고 새롭게 바꾼 일을 하셨습니다. 말씀을 가진 요셉이 애굽 땅에 세워져서 말씀이 선포되었지만 신하들은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 방법을 따라 곡간을 만들고 기근과 싸웁니다. 그러니까 굶주려야 하고 헐벗고 힘들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말씀을 가진 종이 있고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어렵고 힘들게 살고 나는 행복하게 삽니까? 말씀이 전파되고 있고 그 말씀이 귓전을 때리지만 우리 마음에 말씀이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에 찾아오는 어려움과 불신, 문제, 고통을 막아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말이 너희 마음에 거할 곳이 없어서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가진 당신의 종 요셉을 애굽 땅에 보냈지만 요셉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신하들과 백성들은 너무 너무 어렵고 힘들게 살고, 그걸 받아들인 바로는 너무 행복하게 삽니다. 똑같은 애굽 안에서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 차이가 뭡니까? 말씀을 믿고 안 믿는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요셉이 애굽 땅에 와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과 기근이 올 것을 주님이 아시고 오래전에 요셉을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오게 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애굽을 살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감옥에 있는 히브리 소년 속에 하나님이 있을 것이라고 누가 믿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애굽에 하나님을 보내놨는데 다 히브리 종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복을 못 받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통해 하나님을 본 바로만 복을 받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곡간을 버리고 요셉에게 속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녀, 가정 못 이끕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 앞에 굴복하십시오. 말씀을 마음에 두십시오. 말씀을 가진 교회와 종을 여러분 마음에 절대적 권위자로 세우십시오. 역대하 2020절에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을 그냥 애굽 땅에 보내신 게 아닙니다. 이들을 고치고 살리려고 보내셨습니다.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거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내 곡간 필요 없습니다. 요셉의 곡간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이제 바로가 요셉에게 속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리하신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으로 말미암아 복을 입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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