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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혜원 | 2016.05.15 14:13 | 조회 4573


    1. 말씀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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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5일 주일 낮 설교

    본문말씀 [요한복음 9:1-41]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라비가 병든 사실을 발견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을 예수님에게 보내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니 살려달라고 했겠지요? 그때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돌아와서 나사로가 죽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교제를 해주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형편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예수님 귀에 까지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만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가서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인사말을 합니다. 마르다 마음에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틀렸어.’ 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여러분도 내가 맞아, 교회가 틀렸어.’라는 마음을 가져보신 적 있습니까?

     

    열왕기하 3장에서 여호람이 여호사밧을 끌어들여 모압을 치러 갑니다. 가장 편하고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에돔광야길 이었기 때문에, 에돔왕을 끌어들여 같이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세 나라 왕이 의논을 하고 마음을 모아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에돔 광야에 들어간 지 7일 째 되는 날에 전 군인이 가지고 간 물이 모두 바닥이 났습니다. 모든 물통이 바닥나 짐승이든 사람이든 죽음 앞에 도달한 것입니다. 모압 땅에 가 보지도 못하고 이런 상황이 발생하자 지금까지 같은 마음이었던 세 왕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 중 여호람은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려 하시는도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여러분도 여호람처럼 인생을 살면서 잘 되면 하나님을 찬양하다가도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에돔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감각도 느낌도 없이 입을 다물어 버리는 사람입니다. 반면 여호사밧왕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아 나갑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라고 물으면서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죽음이라는 문제가 눈앞에 찾아 왔을 때 한 사람은 원망, 불평, , 대적하는 마음을 쏟아내는 반면 여호사밧왕은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에돔왕은 감각이 없어 아무 말이 없는데, 이것을 보고 영적인 소경이라고 합니다. 나 혼자의 마음과 생각의 세계를 살고 누가 뭐라고 해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15장을 읽어보면 사울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한 번도 사무엘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인물이 많이 나오는데,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의 종의 말을 안 듣고 끝까지 고집 부리고 자기 생각 따라 가다가 자기 아들들이 자기 눈앞에서 죽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고 두 눈이 빠져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왜 눈이 빠지고 죽습니까? 하나님의 종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 때문에 시드기야 왕은 비참하게 생애를 마무리 합니다. 이 세 왕들은 독특한 모양들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의 그림을 그려 놨습니다.

     

    여호람왕은 물이 떨어져 죽음에 직면하게 되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일이 안 되고 어려우면 원망의 화살을 아내나 남편에게 쏘면서 마침내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저 또한 81년도에 구원을 받고 불과 7,8년 전인 구미에서 사역을 하기 전까지는 여호람처럼 살았습니다. 일이 풀리고 잘 되면 감사해하고, 일이 꼬이고 힘들면 불평스러워하면서 수 십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호람왕처럼 하나님을 원망한다고 해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는 병에 잡혀 있다가 죽음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무엇이 나사로를 무덤으로 끌고 갔습니까? 나사로가 병들고 싶어서 병이 든 것이 아니라 나사로에게 찾아온 병을 이길 수 없으니까 나사로가 병에 잡힌 것입니다. 그 나사로를 죽음으로 끌고 갈 때에 나사로도 안 죽고 싶었겠지만 나사로는 절대로 병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병이 나사로를 죽음까지, 썩음에 까지 끌고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사로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나사로를 무덤에서 데리고 나갑니다. 예수님이 잡고 있는 동안에는 나사로가 다시는 무덤 속에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죽음과 병이 나사로를 잡고 있는 동안에는 병이 중해지고 죽음으로 끌려가는데 예수님이 와서 나사로를 잡는 순간에 나사로는 죽음에 더 이상 끌려가지가 않는 거예요. 병이 그를 끌고 갈수 없는 거예요. 죽은 자를 위한 처소가 무덤인데 그 주님이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끌고 무덤 밖으로 나와서 자유롭게 다니는 세계로 옮겨 놓아 버린 거예요.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형편을 믿습니다. 사실은 눈에 보이는 형편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믿기 때문에 형편을 믿는 거예요. 말씀을 믿는다면 형편을 무시하겠죠. 말씀을 믿는 사람은 형편이 죽었든 썩었든 병들었든 그런 것 무시하고 말씀은 안 죽어! 살아나.’ 하고 치고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형편을 믿는 사람은 자기 판단, 자기생각, 자기 본 것 , 자기 느낀 것 자기 것을 믿으니까 말씀을 쳐 내고 거기에 잡혀가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데 형편도 믿어버립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말씀은 나사로는 죽을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형편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말씀을 믿는 사람은 죽은 거 아니야. 잔다.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 라고 할 텐데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었다고 믿으니까 무덤에 돌을 막아놓고 앉아서 곡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는 사람은 형편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형편이 밀려와도 그 형편을 무시하고 짓밟아버리고 외면해버리고 말씀으로 치고 넘어가서 그 말씀 속에 일하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된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으시렵니까? 말씀과 형편을 섞어놓고 믿으시렵니까? 인생 망하면 두 번 망합니까? 예수 믿으면 망하고 싶어도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망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으로 뛰어들면 살아남습니다.

    사역자 모임 할 때 사역자들 틈에 앉아있으면 제가 제일 부족합니다. 부족한 제가 지역장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제가 있을 곳은 다리 밑이고 구걸하면서 살 인생인데, 아님 벌써 죽었을 인생인데...라는 마음을 자주 갖습니다. 주님이 제게 주신 것을 하나 둘 벗겨버리면 저는 서 있을 곳이 없습니다. 신앙을 떠나서라도 세상적으로도 갈 곳이 없습니다. 제게 있는 것은 전부 주님이 주신 거예요. 84년도 신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주셨던 구두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내와 자식까지 모두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복음을 잘 전하지 못해도 복음을 위해 산다고 사니까 하나님이 천 가지, 만 가지 다 도와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병에 잡혀 몸부림을 치며 허덕이고 있는 나를 찾아와서 다시는 그 병에 끌려가지 않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무덤 밖으로 이끌어 내주셨던 것처럼 저에게 그 일을 해주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도 저를 놓지 아니하시고 내 손을 잡으시고 당신이 원하는 믿음의 세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 주님이 제게 마음을 주셔서 청년 합창단도 만들 수 있었고, 앞으로는 뮤지컬을 통해 복음을 전할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이 도우실 것을 믿습니다. 제가 세상에 살면서 청년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누가 들어주겠습니까?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청년들이 따라주고 제 말을 들어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오늘 우리 청년들이 메뚜기떼 처럼 많이 올라와서 합창을 했는데, 제가 뒤에 앉아서 들을 때마다 마음에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노래를 잘해서가 아닙니다. ‘저들이 합창을 하고 연습을 하는 동안에 사단에게 안 끌려간다. 저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생각 할 거다.’ 하면서 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청년들이 합창을 하는 그 때 만큼은 하나님과 마음이 교류되는 시간을 보내지 않겠습니까? 그 시간만큼은 그들의 마음이 사단에 끌려가지 않고 말씀 앞에 젖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시간을 한 번, 두 번 보내다 보면 저들에게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자기의 무덤을 치고 나가서 새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소망스럽고 기쁜 겁니다. 우리교회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전부 다 복음 앞에 새 삶을 산다면 얼마나 행복 할까? 이런 삶을 제 마음에 소망하니까 제 마음에 그렇게 고맙고 소망스러운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노래를 잘 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복음을 잘 전해야 하나님이 기뻐하는 게 아니고 복음 전하는 그 자체를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잡고 도우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사단은 죽음을 주고 병을 줘서 무덤에 가둬 놓지만 예수님은 죽음에서 풀어서 자유롭게 다니게 만들기 때문에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이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의 눈과 귀에는 형편만 보이고 세상 소리만 들립니다. 이제 그 눈과 귀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뭐라고 하시는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나사로의 누이들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눈에 보이는 형편을 더 크게 여기고 형편에 끌려 갔습니다. 우리 또한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내지 마시고, 들은 말씀으로 내 마음에서 올라오는 수 많은 소리를 쳐 내십시오.

     

    요한복음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이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친구는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고 정상으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끝까지 대화가 되질 않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구원 안 받은 사람과 대화할 때 대화가 안 되는 거랑 비슷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 소경은 자신이 눈을 뜬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를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읽지만 믿지는 않습니다. 영적인 소경이면서도 자기들이 소경인 것을 모릅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들이 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빼려고 하기 전에 네 눈에 있는 들보를 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이 사람들이 바로 소경인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사물을 못 보는 걸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를 못 보는 것을 가지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여러분들을 철두철미하게 속여 놓아서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발견하지를 못합니다. 성경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정확한 모습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자기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9장의 날 때부터 소경된 이 사람은 붉다, 아름답다.’ 라는 세계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 세계는 소경으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세계니까요.

     

    마가복음 7장에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사람의 귀와 혀를 풀어주시는 이 이야기를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순천에 파송을 받아서 841127일 새벽 2시에 제가 미리 얻어놓았던 건물 2층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 해 겨울 잠잘 곳이 없어서 집주인 아들이 탁구장을 하려고 갖다 놓은 탁구대 위에 요를 깔고 잠을 잤습니다. 그렇게 시작했던 제 사역은 배운 그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성경보고, 오전에는 천하없어도 앉아서 성경 읽고, 점심 먹고는 아내와 함께 여수로 들어오는 초입에서부터 길을 나눠서 첫 집부터 찾아가 전도를 했습니다. 두 달 반쯤 되니까 예배당 앞 집 까지 오게 되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전도를 했는데 만나는 어떤 사람도 안 오겠단 소리 안하고 일요일에 오겠다고 해서 방석을 깔아놓고 사람들을 기다렸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찾아가서 물어보면 손님이 와서 못 갔어요라고 하는데 손님들이 일요일마다 그렇게 다른 집을 많이 방문하는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84년도, 85년도를 그렇게 살면서 제가 강대상 앞에서 통곡을 하고 운 적이 많습니다. ‘ 왜 내가 무엇을 잘 못해서, 이렇게 복음 전하는데 안 도와 주십니까?’ 라면서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사역을 그만두게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하나님과 씨름하는데 이 마가복음 731절 이하 절 말씀이 제 마음을 밀고 들어 왔습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가 예수님을 만나기전까지 뭔가 말을 하기는 했었을 텐데 그 말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었을까? 어눌하다는 것은 말이 분명치 않다는 것인데, 들은 것이 없기 때문에 어눌하게 말을 하게 됩니다.

     

    내가 소리를 내려면 먼저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만큼, 내가 경험한 만큼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는데, 사람들이 제 말을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예요. 제가 분명하고 뚜렷하게 전달한다면 듣는 사람도 분명하고 뚜렷하게 알아 들을 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제 자신이 분명하고 뚜렷한 말을 할 수 없는 귀먹고 어눌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전도하는 것을 내려놓고, 성경보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저의 귀먹고 어눌한 것을 풀어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날 이후로 하나님께서 마가복음 8장에서 10장까지의 말씀을 풀어주시면서 제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시켜주셨습니다. 제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연결되고 3-4개월 정도 지났을까 사람들이 찾아와서 구원을 받고 교회 안에 26명의 형제자매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분명한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분명하게 듣고 오는 거예요. 제가 부족하더라도 제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주님이 도우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소경이 소경으로 살았을 때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겠습니까? 아무도 이 친구를 거기서 풀어주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이 친구의 눈을 띄워줍니다. 오늘 읽었던 말씀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소경이었던 이 친구의 눈이 밝아진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 사람들은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사람들은 이 소경이 소경으로 답답하고 어둡게 살아 갈 때는 관심도 없었고, 어떤 문제도 안 삼았는데 이 사람이 눈을 뜨고 나니까 간섭하고 그 사람이 맞니 안 맞니 하면서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불러다가 확인을 하는데, 이 소경이 분명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소경이었던 것은 맞는데 예수님이 내 눈을 띄어 주셨다.’ ‘내가 분명히 죄인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고 의인이 되었다.’ 라고 말하는데 여러분 주변 사람들은 그 말을 안 믿는 거랑 똑 같습니다.

     

    9: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않는다고 율법을 통해 가르쳤으면서도 지금에 와서는 그 말을 뒤집고 있는 거예요. 이들은 활자로 된 성경은 읽고 가르치지만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못 보고 못 듣는 소경인거예요. 이들이 자신이 소경인 것을 발견했더라면 예수님에게 나와 죄를 사함 받았을 텐데 자신들이 소경인 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안다는 착각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요한복음941절 말씀으로 마무리를 해줍니다.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평화는 절대로 밀려나가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주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이걸 못 믿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만 주신 게 아니고 나음도 주셨을 뿐만 아니라 허물과 죄악도 끝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죄도, 어떤 병도 우리를 끌어 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가 죽었든 썪었든 예수님이 가시니까 살아납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우리는 병에서 벗어나고, 생각에서 벗어나고, 옳음에서 벗어나 사단에게 끌려가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그 사실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앞에 있는 형편은 형편일 뿐입니다. 형편을 쳐다보면 형편에 빠지지만 주님을 바라보는 즉시 형편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찾아가 주셨듯이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일 하고 싶어 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의 눈을 띄어주셨던 예수님께서 귀 먹고 어눌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세계를 밝히 보여주어 믿음의 세계로 이끌어 가고 싶어 하십니다. 무덤에도 찾아가셨고, 우물가의 여인에게도 찾아가셨고,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자에게도 찾아가셨던 그 주님이 오늘도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님이 두드리시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십시오. 그 말씀에 마음을 정하고 사단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마십시오.

     

    다윗이 므비보셋을 꼴이 없는 로드발 아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끌어다가 왕궁에 두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이끌어 내어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 나라에는 다시는 죄가 없고, 고통이 없고, 슬픔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이 복된 세계를 여러분이 믿음으로 누리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열어서 다시는 소경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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