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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동현 | 2013.10.16 15:39 | 조회 8047

    본문 말씀 (창세기38:1-30)

     

     성경에 천국은 침노하는 자에게 침노를 당한다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허락해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룻기서의 룻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올라 온 때는 보리를 추수하는 시절이었습니다. 그 룻이 시어머니를 찾아가서 나로 밭에 가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고 우연히 찾아간 밭이 보아스의 밭이었고, 보아스의 사환들을 따라 이삭을 줍게 됩니다. 그 곳에서 보아스를 만나 다른 데로 가지 말고 추수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이삭을 주우라 는 약속도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보아스는 룻에게 볶은 곡식과 목마를 때 마실 수 있는 물을 공급해 주었고, 음식 먹을 때 한자리에 앉아 먹을 수 있게 해 주었으며, 룻을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해주었습니다. 룻이 볼 때 이곳보다 좋은 곳은 없는 거예요. 룻이 그렇게 은혜를 입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기록해 두신 말씀이 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추수하다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마라, 옮기다가 빠트린 단은 주우러 가지 마라, 하시면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남겨두라 하셨습니다. 이 룻은 남편이 죽고 없는 과부이며 자기 신과 백성을 떠나 하나님과 나오미의 백성이 되기 위해 베들레헴에 올라온 나그네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 룻을 위해 하나님이 이 밭에 양식을 준비해두셨습니다. 그러면 룻은 이 밭에 들어와서 이삭을 주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여자에요. 이삭을 주우러 온 룻을 위해 보아스가 배려해 준 것이 물과 이삭을 주울 밭, 그리고 보호자를 붙여준 것이지요.

     

     여호수아 20장에 보면 도피성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사는 동안에 본의 아니게 실수로 죄를 범하게 될 경우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산에서 나무를 하는데 도끼자루에서 도끼날이 빠져 쓩 날아가 근처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의 뒤통수를 찍으면 그 사람이 죽겠죠! 이런 것을 부지중에 죄를 범했다고 하는 거예요. 고의가 아닌 우연히 억울하게 부지중에 죄를 범한 이 사람을 보호해주기 위해 하나님이 선정해 준 성읍이 도피성인데 도피성은 6개입니다. 이 도피성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들어가는 게 아니고 이방인들도 들어 갈 수 있어요. 가나안에 살고 있던 그 족속들도 들어갈 수 있어요. 이 성은 어디에서든지 하루길만 가면 들어 갈 수 있는 곳에 있어요.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은 어디서든지 달려가기만 하면 도피성이 기다리고 있기에 피의 보수자로부터 생명을 보호 할 수 있는 거예요. 살고 싶으면 도망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 앞에 이르러 자기 사고를 제사장에게 고하면 도피성안의 장로들이 그를 받아주고 한 곳을 주어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피성을 준 목적입니다.

     

     추수가 끝난 베들레헴에 있는 곡식은 하나님이 남겨 두신 것입니다. 수고해서 일해 줄 사람이 없는 고아, 남편이 없이 버려진 과부, 땅이 없는 여행자와 나그네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 몫으로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밭에 와서 떳떳하게 이삭을 줍겠지요. 반면에 그걸 모르는 사람은 눈치 보겠지요.

     

     신앙이란 내가 무엇을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해 놓았는지를 정확히 알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는 룻을 위해 룻을 이끌어 주고 깨우쳐주는 나오미가 그 곁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속의 다말은 그 행동이나 품은 마음이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모든 면에서 잘했다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가 봐도 어디에 비추어 봐도 용서 받을 수 없는 행동과 삶을 사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여자가 심판 앞에 섰을 때 옳은 사람이 되는 거예요. 누군가가 유다에게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해서 아이를 가졌다 고 고발하자 유다는 다말을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합니다. 다말이 끌려가면서 이 물건의 임자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나 혼자 죽기 억울하다, 나도 죽이고 그 놈도 죽여라 라는 의미로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놓습니다. 다말이 내 놓은 물건은 오래전에 다말이 유다에게서 취했던 물건이죠. 다말이 이 물건을 유다에게서 받을 때에 이미 다말은 유다의 생명과 결탁이 되었습니다. 유다의 끈을 잡는 순간 그 끈은 지금까지 유다의 옷을 묶는 끈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이 끈은 유다와 다말을 묶어주는 끈이 되었고, 도장은 지금까지 유다가 일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지만 이 유다의 도장은 다말이 자기에게 속한 자기 사람이라는 확실한 직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팡이는 유다가 힘들 때 의지하는 것이었겠지만 다말의 손에 들어 온 그 순간부터 그 지팡이는 다말이 유다를 의지하는 지팡이가 된 거입니다. 이건 너무 확실한 것이기에 다말은 너무 편한 거예요. 과부의 신분으로 애를 가졌는데도 사람들 앞에서 입덧을 하면서 요란스럽게 자기가 임신한 걸 드러내는 거예요. 유다의 물건들이 종들을 통해 유다에게 전해지자 유다가 꼼짝을 못하는 거예요. 다말은 자기가 한 행동에 의하면 불살라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죽지 않고 사는 거예요.

     

    고전 6: 9-1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 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절대 유업을 받을 수 없고, 용서 받을 수 없고 버려지고 죽어야 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도장과 끈, 지팡이가 훗날에 나를 어떻게 해 줄 것을 다말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말이 시집을 왔는데, 남편이 악해서 하나님이 죽여 버리고 죽은 남편의 아우가 다말을 취했는데,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땅에 설정해 하나님이 그도 죽이십니다. 생명에는 관심이 없어 복음을 전하지 않는 그 사람에게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말을 유다집의 며느리로 보낸 것은 한 남자의 정욕을 채우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와 족보를 잇는, 생명을 얻는 그 일에 쓰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말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평범한 여자로서 남자를 찾아온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가는 그 일을 위해서 왔는데, 그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할 유다 아들들이 악해서 죽고, 내 것이 안 된다는 생각에 잡혀서 죽는 거예요. 그래서 다말은 셀라가 자라기를 기다리는데 유다 편에서는 다말에게 셀라를 주면 셀라도 죽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유다가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 수절하게 합니다. 다말이 친정에 와 과부의 의복을 입고 수절하고 근신하면서 지내는 것이 친정부모에게도 좋고, 시아버지에게도 좋고, 어린 셀라에게도 좋고, 이웃사람들에게도 좋고 아름다운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안 좋은 거지요. 생명을 얻는 그 라인에서 끊어져 있는 그 세계를 하나님이 아름답고 좋게 보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말이 기다려도 기다려도 유다가 자기를 부르지 않는 거예요. 셀라가 장성했는데도 자기를 안 부르는 거예요. 쫓겨난 다말에게는 길이 없쟎아요. 오직 생명을 잇는 일에 온 마음이 다 가 있던 다말에게 어느 날 유다가 딤나에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과부의 옷을 입고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있던 다말이 과부의 옷을 벗어버리고 창녀의 옷을 입는 거예요. 그리고 집을 나서 길바닥에 내려가는 겁니다.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를 건들지 누가 압니까? 그런데 다말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기 위해 자신을 유다집의 며느리로 보낸 것과 지금 유다가 딤나에 올라오는 것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걸 알고 있었습니다.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누가 봐도 용서가 안 되는 정말 악하고 더러운 행실이었지만 하나님이 다말을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기 위해 이 집에 보내셨기에 씨를 받기 위해 자기 옷을 벗어버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조롱을 받는 가장 천하고 무시 받는 창녀의 옷을 입고 길바닥에 앉아 있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유다를 만납니다. 다말이 과부의 옷을 입고 있으면 수절은 할 수 있지만 생명과 연결은 안 됩니다. 씨를 얻을 수 없어서, 얻은 씨를 지키기 위해서 이 다말은 유다의 약조물이 필요했던 겁니다. 내 안에 있는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고 씨를 준 저 분만이 지켜줄 수 있기 때문에 약조물이 필요한 거죠. 우리가 얻었던 복음, 내가 이 복음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이 복음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게 약속을 주신 그 분의 약속이 필요한 겁니다. 다말은 내가 이 씨를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와, 내가 가진 씨를 지킬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유다의 약조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도장과 끈과 지팡이가 심판 앞에 끌려가는 이 여자에게 심판을 뒤로 미루고 생명을 살리는 근원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의 마음을 말씀과 연결시킬 약조물이 필요한데, 여러분 손에 들려진 66권의 말씀가운데 하나님과 여러분을 묶어줄 수 있는 약속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말씀이 없다면 아무도 여러분을 불신에서, 어두움에서, 원망에서, 정욕에서, 죄악 속에서 여러분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끌려가는 여자를 누가 풀어줄 수 있습니까? 무엇이 여자를 끌려가는 삶에서 중단시켜줍니까? 이 여자는 유다가 보낸 사람을 뿌리칠 수가 없습니다. 사단이 여러분을 끌고 갈 때, 음란이 끌고 갈 때, 간음이 끌고 갈 때, 욕망이 끌고 갈 때, 불신이 끌고 갈 때에 누가 여러분을 그 속에서 지켜 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을 지켜 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내 마음에 그분을 두지 않는다면, 내 마음은 짓밟히고, 피폐해지고, 더러워지고, 음란해지고, 도적의 소굴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 예루살렘 성전 안에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염소가 울고, 양이 울고, 소가 있고, 돈 바꾸는 사람이 있고 성전 안이 도적의 소굴이 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을 들었습니다. 상을 뒤엎고, 이리 후리치고, 저리 후려치면서, 염소와 양과 소를 몰아냅니다. “내 아버지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도적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라고 하시면서 쫓아내셨습니다. 그 당시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내놓으라하는 수많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인들이 앉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성전에 들어와 있는 짐승을 보고 싸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성전에 들어와 있는 더러운 것들을 보고 불편해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시대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마음은 어떻습니까? 오늘 나의 마음은 어디로 끌려가고 있습니까? 마음에서 무엇을 즐기고 있습니까? 의심을 즐기고 있습니까? 불신을 즐기고 있습니까? 음란을 즐기고 있습니까? 간음을 즐기고 있습니까? 담배, 술을 즐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은 있었지만,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내안에 말씀이 없으면 이런 식으로 타락해 갑니다.

     

     유다의 마음에는 다말이 가진 마음이 왜 없을까요? 종들은 복음 때문에 몸부림을 치는데, 왜 우리는 그 마음이 없을까요? 짓밟혀 있다는 겁니다. 잃어버린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당신의 몸을 찢어주고 내어주고 사는 복음을 가진 많은 종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 삶 자체를 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할 필요가 없고, 성경을 배워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왜? 너무 많이 아니까. 많이 알지만 믿음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다말은 그걸 알았습니다. 나 같은 여자를 이 유다 집안에 왜 보냈을까? 나같이 이런 못난 여자를 왜 여기 보냈을까? 한 여자로서 행복한 삶을 살라고 보낸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같은 여자의 몸에 그리스도의 계보에 올라갈 씨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어 가려고 보냈구나. 그런데 이 집안사람들이 악해서 하나님이 죽이시는구나, 유다가 눈이 어두워서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구나, 나는 그래도 시아버지를 믿었는데, 셀라가 자라면 나를 부를 줄 알았는데 안 불러주는구나, 이렇게 끝나야 되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 안에 가보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다른 거예요. “내가 널 거기 보낸 것은 너를 통해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으라고 보냈는데, 너 왜 포기해 일어나 나가, 네 옷 벗어, 모든 사람에게 짓밟히고 무시당하는 창녀가 되면 어때? 생명의 씨만 받으면 되쟎아?”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목사라는 직분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직분이 뭐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있다면 나를 통해 이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싶어서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목사로 사는 걸 기뻐하지 않습니다. 직분을 갖고 위치에 앉아있는 걸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우리가 벗어야할 옷이 있습니다. 다말이 과부의 옷을 벗고 가장 천하고 무시당하는 사람이 입는 그 창녀의 옷을 입고 길바닥에 내려앉습니다. 거기서 생명과 연결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을 벗길 바라십니다. 우리는 무슨 옷을 입고 있습니까? 내가 잘한 옷, 성실한 옷, 반듯한 옷, 깨끗한 옷, ...다 벗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것도 입힌 적이 없습니다. 벌거벗겨 놓았습니다. 나를 위해서 내가 입어야 할 옷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부터 자기를 위해서 옷을 입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왜 교회 안에서 내 마음을 가려야 되고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됩니까? 나를 드러내면 주님이 내게 필요한 옷을 입혀 가실 겁니다.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이 다말은 여자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옷 즉 자기 인생을 포기하지 아니하면 입을 수 없는 옷을 입고 길바닥에 내려앉았습니다. 왜 그 자리에 내려갑니까?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옷을 벗어버리고, 권위의 옷을 벗어버리고 사람에게 짓밟히는 그 옷을 입고 당신이 만든 인간에게 당신이 만든 물건 앞에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그 옷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과 끊어져 있는 인간의 생명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살리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자가 씨를 받으면 그 몸 안에서 그 씨가 자랍니다. 그렇듯이 말씀이 들어와야 말씀이 우리 안에 일을 합니다. 머릿속에 아무리 말씀을 넣어 놓아도 그 말씀은 우리의 아무것도 바꿔주지 못합니다. 마음이 열리고 마음 안에 말씀이 들어올 때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삶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꿉니다. 내 말이 너희마음에 거할 곳이 없다 하신 예수님은 우리마음에 들어오고 싶어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 20절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성경에 나와 있는 문은 손잡이로 여는 문이 아닙니다. 이 문은 마음의 문이죠. 에수님은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슬픔을 통해, 병을 통해, 실패를 통해, 고통을 통해, 어려움을 통해, 자식을 통해, 남편을 통해, 세상의 많은 일들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실 겁니다. 우리는 두드리는 그 소리를 듣긴 듣는데, 저놈이 죽일 놈이야 저놈의 자식이 나쁜 자식이야 라고 하면서 그걸 두드린 대상과 싸우고 있지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들어서 왜 내 마음을 두드리고 있는지 모르니까 시끄럽다 면서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속에 감각을 주십니다. 그 감각을 통해서 하나님이 지금 나한테 뭔가 일하고 계시는구나, 그래서 그 사건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가서 왜 나한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지, 아픔을 주시는지, 질병을 주시는지, 누명을 뒤집어쓰게 하는지 주님 앞에 가서 묻고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음성을 못 들으면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이해되는 걸로 처리해 버리기 때문에 일은 해결되는데 시간이 지나면 또 그 문제에 걸려 넘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대상은 다르지만 똑같은 레파토리, 스토리는 다르지만 다시 또 그 길을 가야 하는 거예요.

     

    어린 아이가 태어나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하면 잘 못 걷습니다. 뒤뚱뒤뚱 걷다가 넘어져 무릎팍도 깨고... 그렇죠? 코도 깨지고 무릎도 깨지고 그러면서 아이가 계속 걷는 걸 배웁니다. 다쳐도 다시 시도하고 포기 안 합니다. 맞죠? 그렇게 자라다보면 이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 손잡고 길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단 말입니다. 그 아이가 만약에 힘들다고 걷는 것을 포기했다면 자라서도 걷지 못하고 기어 다니겠죠. 하나님은 우리 육체를 그렇게 놔 두지 않으셨어요. 말씀으로, 형편으로, 어려움으로, 문제로 인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때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을 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들어옵니다.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서 나와 더불어 먹겠다고 했습니다. 나와 더불어 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내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사단은 이걸 못하게 만들어요.

     

    다말은 지금까지 유다의 말에 잡혀서 친정에 가서 과부의 옷을 입고 수절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다말이 왜 유다의 말을 무시하고, 창녀의 옷을 입고 길바닥에 내려앉느냐?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유다를 쳐 내고 말씀을 따라 가는 거예요.

    에스더 성경을 읽어보면 에스더가 수산궁에 갇혀있습니다. 그가 수산궁에 갇혀서 아하수에로왕 앞에 못나가고 있는데, 모르드개가 하닥을 통해 에스더에게 왕 앞에 나가라고 해도 에스더는 못나간다고 주저앉아 있습니다. “왕의 부름을 못 받은 지 30일이 지났다, 이 나라의 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왕에게 부름을 입지 않고 왕 앞에 나갔는데, 왕이 금홀을 내밀지 않으면 죽는다” 라고 하면서 못나간다고 합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끄집어내는 일을 합니다. 계속 말씀을 보내서 부딪치고 싸우는 겁니다. “너 거기 있으면 죽어, 네 아비도 죽고 너도 죽고 다 죽어. 너 아니어도 우리는 살아” 에스더는 지금까지 자기 소리를 듣고 살았던 여자입니다. 왕이 나를 안 찾은 지 30일이 지났고 이 나라 법이 있는데 내가 이 법을 어기고 왕 앞에 나갔다가 왕이 금홀을 안 내밀면 나는 죽어 그러니 갈 수 없어 라는 생각 속에 빠져있는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싸워서 결국 에스더를 이깁니다. 모르드개의 말이 에스더의 생각을 이겨버리니까 에스더가 자기 생각을 깨뜨리고, 형편을 깨뜨리고, 법을 깨뜨리고 뛰쳐나와서 아하수에로왕에게 나아가는 거예요. 무엇이 수산궁을 벗어나게 만들고, 무엇이 여자의 법을 깨트리게 만듭니까? 무엇이 에스더를 지금까지 묶어 놨습니까? 무엇이 다말을 수절하게 만들었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지금 이렇게 살게 만들었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있는 생각이,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지식과 성경의 논리가 여러분을 안주하게 만들었고 여러분을 타락하게 만들었고 복음 못 전하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말씀이 마음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깨뜨리고 자기를 벗어버리고 뛰쳐나갑니다.

     

    과부의 옷 아무나 벗는 거 아닙니다. 무화과 나무 옷을 하나님이 벗겨줄 때 가죽 옷을 입는 것이지, 그들 스스로 벗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과 아담 하와가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의 무화과 나무 옷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하나님이 준비한 가죽옷을 입는 이야기가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내 행위와 내 수고와 내 노력이 내 의지와 내 각오가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발견하시길 저는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위해서 준비한 모든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준비하신 의의 옷을 입으시고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것을 가지시고 주님 앞에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사는 그 자체가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 다 준비해놨습니다. 당신의 의의 옷을 준비해놓고, 당신의 의로움을 준비해 놓고, 당신의 거룩함을 이루어 놓고, 그 모든 것을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넣어 주고 있습니다. 내 소리를 듣는 동안에는 나는 교회를 떠나야 되고, 대적해야 되고, 거스려야 되고,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나를 빼고 말씀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따라가면 되는데, 그걸 못하게 하는 게 사탄이란 말입니다. 누가 이 다말을 수절하게 만들었습니까? 유다가 자기 아들 셀라가 죽을까봐 자기 아들을 지키려고 하니까 다말을 쫓아내야 하는 거예요. 유다가 하는 일이 옳은 것처럼 보이고 맞는 것처럼 보여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말의 마음을 바꿔 과부의 옷을 던져버리고 창녀의 옷을 입고 뛰어 들어가 생명의 씨를 받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신다면 그말씀은 여러분을 이끌어 내서 약속이 있고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는 아하수에로왕 앞으로, 먹고 마시고 잔치하는 그 세계로 에스더를 이끌어 가는 것처럼 여러분과 내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다말이 유다로부터 씨를 받았을 때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 손에 있는 지팡이를 쳐다 볼 때마다 도장을 쳐다 볼 때마다 끈을 쳐다 볼 때 마다 이 다말은 너무 행복했을 것 같아요.

     

    이사야 43:10-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3절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이사야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내 손에 잡힌 자는 아무도 못 뺏어간다 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고 복음의 일을 하시겠다는데 누가 그걸 막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잡고 복음의 일을 하시겠다면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과 함께 사시길 바랍니다. 다말은 남편에게 버림받고, 시아버지에게 버림을 받고 다 버림 받았지만 하나님은 다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버렸습니다. 섭섭할 겁니다. 인정 못 받고, 대우 못 받고...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을 잡고 계십니다. 그분과 함께 이제 여러분 앞에 있는 문제들에 부딪쳐 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이 원하는 안정되고 안일한 옷 벗어버리고 다말이 입었던 옷 같은 가장 천하고 못난 옷을 입고 주님의 손에 잡혀 인생의 길을 가보십시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면 내가 물속에 간들 불속에 간들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사야 43: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어떤 문제, 어떤 심판 앞에서도 내가 너를 지켜줄게 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면 내게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여러분, 돈 없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세상에서 인정 못 받는다고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못 가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어려움을 풀어주시고 해결해 주실 겁니다. 이제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이 삶을 배우십시오. 다말은 길이 없고 방법이 없고 버려졌고 쫓겨났지만 하나님이 그를 잡으니까 생명의 씨를 얻어서 그리스도의 계보에 올라가는 여자가 됩니다. 다말이 한 일은 천번 만번 맞아 죽을 짓이었지만 복음 때문에 가는 그 여인의 길을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이제 여러분의 틀을 깨고 말씀 안에 있는 그 길을 걸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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