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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영란 | 2014.01.16 19:43 | 조회 5638

      

    왼쪽이 김지호- 무전여행을갔다 맛있는 점심을 주었던 가족

    2013년 한해동안 아프리카 르완다로 IYF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굿뉴스코해외봉사를 다녀왔다. 사실 내앞에 닥칠 미래가 나에게는 더 시급했다. 많은 학생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부모님과의 갈등으로 참 많은 고민이 있었다. 특히 아버지와 같이 일을 하면서 아버지와의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빚이 많았지만 갚을 의지가 전혀 안보이는 아버지의 모습과 일을 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행동에 의한 의견대립 등으로 내 심신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아버지가 연세를 많이 드셨다는 것을 감안해도 정말 아버지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 없었다.
     


    르완다 월드캠프때 볼레리아 공연한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능력도 안됐고 상황도 안됐다. 내 생각에는 가장 모양세 좋게 적은 비용으로 오랜기간 동안 아버지를 떠날 수 있는 방법은 해외로 떠나는 것이었다. 말그대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무작정 모아놓은 돈을 들여가며 아프리카로 떠나게 되었다. 해외봉사를 떠나는 특별한 마음보다는 무작정 떠난것이다. 한마디로 마음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워크샵을 하며 반교사를 맡은 목사님께서 내가 가진 마음의 상태를 보고 심하게 책망을 하셨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목사님이 대체 뭘 알고 나에게 이런말을 하실까. 나랑 아무사이도 아니면서 이런말 해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어 목사님의 말씀은 양쪽귀의 달팽이관이 연결되듯 머릿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한귀로 듣고 한귀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나는 생전 처음으로 부모님을 떠나 아프리카 르완다로 떠나게 되었다.



    어린이 영어캠프때 요리교실을 맡았다.

    사실 아프리카 하면 초원에서 사냥하면서 쇠똥으로 만든 집에서 사는 그런 광경을 상상했다. 하지만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 도착하자마자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키갈리의 모습은 한국만큼 깨끗했고 전혀 아프리카 스럽지 않은 건물에 사람의 옷차림 또한 세련되 보였다. 르완다의 생활 또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편했다. 한국에서의 삶보다 훨씬 편했다. 비록 가진 돈은 없지만 한국에서 하던 고민은 안해도 되고 선교사님의 지시대로 여기 가라고 하면 가고 저걸 시키면 하면 됐기 때문에 몸은 힘들지 몰라도 마음은 편했다. 내가 나이도 많아서 나랑 같이 갔던 굿뉴스코 학생들도 내 말을 잘 따라줬다. 그리고 한국에서 그래픽디자인 관련 일도 했었기 때문에 교회의 각종 홍보물도 만들기도 했고 한국에서 리모델링 DIY 경험을 살려 선교 외적인 작업도 많이 했다. 심지어 부엌일도 여자단기들보다 잘하는 바람에 사모님께서 부엌일도 내게 맡기실 정도였다.


    아버지는 날 무시했지만 선교사님에게는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서 정말 일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선교사님은 그런 나의 모습은 잘 보지 않으셨다. 선교사님은 무슨 일이든 신앙과 관련해서 말씀을 하셨다. 가령 오늘은 비가 안오네요 라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이러한 일을 하라고 비를 안주신거야 라고 말씀하시던지 저기 저쪽에 아보카도나무가 있는데 주인이 관리를 안하는 것 같은데 따와서 같이 먹어요 라고 말을 하면 그런 행동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지 생각해 봐라 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이런 신앙적인 마음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듣고보니 잔소리 같기도 하고 자꾸 그런식으로 무안주는거 같기도 해서 자연스레 선교사님과의 대화도 줄어들었다.
     


    키갈리 ULK대학에서 진행된 컬쳐때

    그렇게 생활하다 6월에 선교학교 학생이었던 어거스틴과 무전전도여행을 떠났다. 같이 여행하며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그때 문득 깨달았던게 르완다에서 4달간 생활하면서 어거스틴과 이렇게 대화를 많이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유쾌한 친구라서 먼저 말도 걸어주고 했었지만 그닥 대화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내 영어실력도 문제였겠지만 그것보다는 너랑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아 라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어거스틴 뿐만 아니었다. 아프리카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참 많은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하다. 일단 아프리카 사람들이 백인을 신기해 하기도 하고 마음도 열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정말 마음을 나눌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귀찮으니까, 내가 싫으니까 이런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런 상황을 피하고 살았던 것이다. 마음을 나눈다는게 어떤건지 무전전도여행을 가며 깨닫게 되었다.
     


    전도여행중

    신앙적으로도 나는 문제가 정말 많은 사람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선교사님은 내게 너는 일은 잘할지 몰라도 네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안계셔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말을 들으면 좀 창피하기도 해서 고칠생각보다는 숨기고 싶다는 마음도 많이 들었다. 그렇게 생활을 하던 중 내 르완다 생활에 가장 힘들었던 두번의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르완다 월드캠프 기간이었는데 첫 번째 사건을 설명하자면 첫날부터 여러 가지 일에 지연이 생겨 정말 바쁜 상황이었다. 사람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얼른 행사장으로 가야하는데 후진을 하던 도중 접촉사고를 낸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굴러다니는 차는 80퍼센트가 고물차인데 하필이면 내가 박은 차량은 20퍼센트에 속하는 상태 좋은, 그것도 회사소속 차량이었다. 운전자도 자기차가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난감해 했다. 고물차면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면 끝나는 일인데 당연히 수리비를 물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두 번째 사건은 설명하면 길지만 월드캠프 끝나는 날에 보안을 허술하게 하는 바람에 사모님의 최신 스마트폰을 분실해 버린 것이었다. 정말 두 상황 모두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사고였다. 정말 그전까지는 내가 잘하는 것만 보고 내 스스로에게 의지하며 행동해 왔는데 나를 믿는 결과가 정말 이런 어이없는 사고를 일으키며 정말 하나님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고아원방문 봉사활동후 

    친누나의 결혼식 또한 나에게는 정말 하나님에게 감사해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내 기억속의 누나는 절대 결혼을 할 수 없는 여자였다. 누나가 2010년에 단기를 갔다온 뒤 기쁜소식사에서 일하게 되며 그 뒤로 같이 산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실한 신앙생활 때문인지 누나는 11월에 정말 좋은 형제를 만나 결혼을 했다. 부모님은 주위에서 사위 잘만났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으셨다고 한다. 누나의 결혼식은 나에게 있어서 기적이었지만 누나와 부모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사실 1월초까지 르완다에 있을 예정이었지만 누나의 결혼식 때문에 2달 일찍 귀국하게 되었다. 정말 2달이라는 시간이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정말 아쉽고도 아쉬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갔다오고 나서 뭔가 변화했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돌아와보니 여전히 나는 아버지를 이해 못하는 똑같은 아들이었다. 하지만 바뀐게 있다면 전에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무작정 싸울 생각부터 했다면 지금은 아버지에게 뭐가 맞고 뭐가 틀린건지 차분하게 설명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대화를 그런식으로 했더니 아버지와의 의견 충돌도 정말 자연스럽게 풀리는 것을 경험했다. 이런 귀중한 진리를 깨닫게 해준 르완다의 선교사님과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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