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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동현 | 2015.03.13 22:37 | 조회 6008

    주일 낮 예배

    본문말씀 (열왕기상 17:8-16)

     

    그림에는 그리는 사람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글 속에는 글을 쓰는 사람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생각하고 묵상하고 상상하고 그 속에 빠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그림을 화폭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내 마음에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글도 마찬가집니다. 글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런 세계에서 살아야만 글이 나옵니다. 말씀도 마찬가집니다. 말씀에 빠져야 하고 심취해야 합니다. 내가 말씀 속에 빠져 들어가서 말씀에 나오는 내용 속에 살아보지 않으면 그 속에 담겨 있는 마음을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강대상 앞 쪽에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처음 볼 때는 괜찮은 것처럼 보이는데, 계속 쳐다보면 자연스러운 맛이 전혀 없어서 싫증이 납니다. 저런 것들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표출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소나무는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고 사람에게 편안한 마음을 줍니다. 이 성경은 어디를 읽어봐도 인간의 손길이 닿은 곳이 없습니다. 반대로 인간이 개입되는 것들은 항상 복잡하고 어렵고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그리는 그림과 인간이 그리는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주 옛날에 말 타고 다니거나 걸어 다니던 시절 초봄이나 되었을까 정만수라고 하는 선비가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나들이를 갔습니다. 계곡을 건너고 산마루를 지나 강 앞에 다다랐습니다. 예전에는 징검다리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징검다리가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분이 두루마기를 접어 허리춤에 차고, 짚신과 버선을 벗어서 허리에 차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강물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뒤에서 다른 선비가 이 광경을 보고 선비 양반, 강물이 차갑소?’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강을 건너는 선비는 들은 척도 안하고 계속 강을 건너 건너편에 도착했습니다. 물을 훔치고, 바지를 내리고 버선과 짚신을 신고 두루마기를 내리고 걸어가면서 고개를 돌려 한다는 말이 글쎄올시다. 내가 건넌 강물은 이미 다 흘러갔으니 그대가 건널 강물이 차가운지 내가 어찌 알겠소? 그대가 건너봐야 알지 않겠소.’ 이러며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참 많은 의미와 뜻이 있습니다. 이른 봄에 강물이 차갑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겁니다. 내가 건넌 강물이 흘러갔다고 뒤에 오는 강물은 덜 차갑습니까? 그런데 우리 말 속에는 뼈가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그냥 단순하게 강을 건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살이를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작이라는 강 이편에서 강 저편으로 건너가는 이야기는 인생의 출생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강물이 차갑소?’ 라는 질문은 인생이 고달픕니까? 즐겁습니까? 행복합니까?’ 라는 의미의 질문이 될 수도 있겠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내가 건넌 강물은 이미 흘러갔으니 그대가 건널 강물이 차가울지 내가 어떻게 알겠소라는 말은 내 인생과 그대 인생이 다른데, 내가 어렵다고 당신이 어렵고, 내가 행복하다고 당신이 행복하겠소? 나한테 어려운 게 당신한테는 쉬울 수도 있고, 나에게 괴로웠던 것이 당신에게는 행복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내가 어찌 당신 인생을 논하겠소. 이런 의미라고 할 수 있겠죠!

    마찬가지로 내가 어려움을 통해, 이런 저런 마음의 갈등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던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신앙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선비가 강물에 뛰어 들어야 강물이 차가운지 정확하게 알듯이 우리도 믿음으로 살아봐야 믿음은 이런 거다라고 말해 줄 수 있고, 마음을 꺾어 봐야 마음을 꺾는 것은 이런 거다라고 말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라고 말 할 수는 있어도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 그 삶을 가르쳐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 말씀하셨는데, 믿음으로 사시려면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세계로 뛰어 들어야 합니다.

    믿음의 삶을 살지 않고 믿음이 이런 것이야 신앙은 이런 것이야 이렇게 논하는게 바리새인들의 삶입니다. 신앙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게 아니고 내 자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열왕기상 178절부터 12절까지는 사르밧 과부라는 화가가 그려놓은 자기 인생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 속에는 행복이 없고, 소망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그리는 그림 속에 아빠가 없는 그림이라든지, 엄마와 손을 안 잡고 있는 그림을 보게 되는데, 그들은 어리지만 그림을 통해 가정이라는 울타리안에서 느꼈던 것을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림을 그린 아이들의 마음상태는 심각한 거예요. 그 아이들의 그림 속에는 가정에서 만들어지는 기쁨과 즐거움, 사랑이라는 장면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여인의 그림에도 기쁨을 찾아 볼 수가 없고, 소망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뭔가에 쫓기고 있으며, 어려움이 짓누르고 있고, 불안하며, 근심이 가득 찬 그림이에요.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는 이 그림의 결국은 죽음으로 끝이 나는 거예요. 그런데 16절을 보면 신기하게도 슬픔이 사라진 그림이 등장하는 겁니다.

     

     

     

    염려와 불안이 사라지고, 사망의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생명의 세계가 쫙 펼쳐지는 그림인거예요. 저 또한 제 인생의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는데 이 여인이 그리는 그림이상의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내 인생의 그림만 못 그리는 게 아니고 내 자식을 위해서도, 내 아내를 위해서도 이 이상의 그림은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이 자기 자식이 죽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겠습니까? 이 여인도 이런 그림 그리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바꿀 수 없는 거예요.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재료로는 기쁨을 그릴 수 없고, 자식에게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너무 애절하게 자식에게 생명을 주고 싶은데 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너무 너무 안타깝지만 이 여인은 자신도 자기의 아들도 죽음으로 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종 엘리야는 무슨 재료를 가지고 있는지 이 그림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습니다. 슬픔도, 괴로움, 고통, 원망 다 지워버리고 죽음도 지워버리고 전부 다 소망으로,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생명으로 바꾸는데 그 그림은 정말 아름답고 멋있는 그림인 것입니다. 제 눈에는 그 성경이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열왕기상 178절에서 13절까지의 그림을 그린 사람은 사르밧 과부입니다. 이 그림은 엉망인데, 하나님이 보낸 엘리사가 와서 다시 그리니까 정말 멋지게 바뀌는 겁니다. ‘우리 대학생들이 그림을 아무리 잘못 그려놔도 예수님이 붓대를 잡으면 저들의 인생이 멋진 인생으로 달라지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박희진이가 26년 동안 그린 인생은 어렵고 원망이 쌓이고 한이 맺히고 버림받아 죽음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인생의 붓대를 잡아 병을 지우고 건강하게 그려주셨고, 원망을 죽이고 소망의 그림을 그려줬습니다. 그러니까 열왕기상 17장은 사르밧과부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제 이야기도 되는 것이죠. 이 그림을 누가 지울 수 있습니까? 이 그림은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그림입니다. 훔쳐갈 수도 없는 그림입니다.

     

    이사야 43:1-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기 1절에 조성이란 새롭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너를 조성하신 자나를 바꾼 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 분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는 평생 두려워하면서 살았는데 물이 나를 침몰치 못하게 할 것이며 불꽃이 나를 사르지 못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불 속에서 타지 않도록, 강물이 나를 침몰치 못하게 만들어놓으신 겁니다. 아무도 나를 해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병으로 인해 인생을 어렵게 살았고, 가난 때문에 어렵게 살았고, 힘들고 고달프게 살았습니다. ‘라는 인생의 그림을 멋지게 그려보려고, 정말 위대하게 그려보려고 했는데 완전히 망쳐 버렸습니다. 그냥 망친 게 아니라 꾸깃꾸깃 꾸겨져 버렸습니다. 완전 쓸모없는 그림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주님이 찾아오셔서 펴 가지고 새롭게 바꾸셨습니다.

     

    불꽃이 사르지 않는 그림을 그려놨고, 강물이 침몰치 못하는 그림을 그려주셨는데, 여러분에게도 그런 그림이 있습니까? 이사야 431절과 2절 말씀은 야곱에게 하신 약속이면서 여러분과 나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물감이 없으면 화폭안의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가 없습니다. 내 인생에는 기쁨이라는 재료가 없으니까, 기쁨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못 그립니다. 내 가정에, 내 아내에게, 내 자식에게, 내 이웃에게 기쁨의 그림을 주고 싶은데 내게 기쁨의 재료가 없으니까 기쁨을 그려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내게 있는 재료는 죽음밖에 없으니까 나도 죽고, 아들도 죽어야 되는 겁니다.

    나와 내 아들이 마지막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이게 여인이 그린 그림입니다. 이 여인은 그 이상의 그림을 못 그립니다. 얼마나 이 그림의 마지막이 슬퍼요? 하나님이 그걸 아시고 엘리야를 보내셨습니다. 이 여인과 엘리야를 만나게 해서 엘리야가 이 여인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겁니다. 엘리야에게는 기쁨이라는 재료가 있고, 소망이라는 재료가 있고, 즐거움이라는 재료가 있고, 생명이라는 재료가 있으니까 이걸 갖고, 죽음에다가 씌어버리니까 죽음이 끝나고 생명으로 바뀐 겁니다.

     

    하나님이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이 여인을 찾아가서 그림을 바꿔놓고 삶을 바꿔놓고 생각을 바꿔놓으셨습니다. “네가 아무리 그려봐도 너로서는 행복으로 그릴 수 없어. 기쁨의 그림을 그릴 수도 없어. 왠지 알아? 네게는 그런 그림을 그릴 재료가 없어. 이제 네 인생의 붓대를 놓고 종의 말을 한 번 들어봐라.”

    그런데 이 여인이 엘리야의 말을 듣더라구요. 엘리사가 뭐라고 합니까? “물 좀 다오.” 하니까 물을 뜨러갑니다. 물 뜨러 가는 여자를 보고 물만 가져올지 말고 떡도 해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인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과부에게 너에게 있는 조금 남은 가루로 떡 만들어서 내게로 가져와이 말은 너는 비켜, 내가 할게라는 뜻입니다. ‘네 인생 내가 책임질게이런 의미입니다. 이 여자는 남은 가루 조금으로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떡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거 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이런 마음을 가지는 게 당연한데, 신기하게도 이 여인은 엘리야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엘리야가 전해 준 말은 엘리야 개인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엘리야를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였고, 말씀을 받아들였을 때 남은 가루로 선지자 엘리야를 위해 떡을 만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까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료로만 그림을 그렸는데, 엘리야의 말을 들으면서 자기의 재료를 버리고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재료로 인생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신이 준비한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으로 자기 인생의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 나타나서 사르밧 과부에게 네가 준비한 재료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재료로 네 인생의 그림을 그려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놀랍게도 마음을 바꾸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발을 딛게 됩니다.

    사르밧과부가 자신이 준비한 것을 끝내고 하나님이 준비한 재료로 그림을 그리니까 하나님의 재료는 바닥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준비한 재료는 많이 있는 중에서 팍팍 줄어가는데, 하나님이 준비한 재료는 아주 적은 양인데도 퍼내도 퍼내도 계속 채워지는 거지요. 이 재료로 그리는 그림은 즐거움의 그림, 나눔의 그림, 섬김의 그림이 되는 겁니다. 이 여자는 슬픔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못 그리는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의 재료로는 슬픔을 만들고 싶어도 만들지를 못하는 거예요. 우리의 재료는 소망처럼 보여도 결국엔 고통으로 바뀌고, 하나님이 주신 재료는 고통처럼 보여도 결국엔 즐거움과 소망으로 바뀌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저는 26년 동안 제 인생의 그림을 제가 그렸습니다. 내가 준비한 재료를 가지고 멋지고 화려하게 그리려고 구도를 잡아놨는데, 완전 찌그러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낸 것처럼 제 인생 속에도 하나님의 종을 보내주셔서 제 인생의 그림을 다시 그리게 해 주셨는데, 이 그림은 내가 봐도 너무 멋지고 소망스런 그림인거예요. 슬픔도, 괴로움도, 고통도 없는 행복한 그림이 제 생애 속에 날마다 더해져 가고 있는 복을 제가 입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인생의 붓대를 놓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종이 여러분 인생의 그림을 그려줄 수 있도록 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 인생을 그리게 된다면 우리의 그림은 소망으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입었던 은혜를 우리에게도 입혀주고 싶어서 우리의 삶속에 일을 하시는데, 룻기 성경에 보면 이와 같은 그림이 한 점 더 나옵니다.

     

    3:1-4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나오미는 룻이 안식할 곳을 구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룻은 지금이 너무 행복한 거지요. 베들레헴에서 나오미와 함께 살 수 있으며, 이삭 주우러 갔는데 이삭도 많이 줍고, 물도 얻어먹고, 사환들을 통해 보호를 받고 있는 삶으로도 만족하고 있는데, 나오미의 마음에서는 룻이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이 복이 아니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원하는 룻의 안식할 곳은 보아스의 품입니다. 나오미의 사람이 아닌 보아스의 사람이 되어야 룻이 복된 삶을 살 수 있기에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의 품으로 밀어넣는 것이지요.

    룻이 자기 인생의 그림을 그리는데 남편이 없어도 나름 행복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룻에게 닥쳐오는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듯이 하나님은 나오미를 통해 룻을 보아스의 품으로 밀어 넣는데, 룻이 보아스에게 속해서 보아스로부터 기업을 물려받고 보아스의 생명을 얻는 세계로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삶속에는 은혜를 입는 삶은 있지만 생명은 끊어져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곳은 쉬는 곳이 될 수 없습니다. 사단에게 속아서 종노릇하는 인생의 마음을 되찾아서 내게 돌려 줄 수 있는 , 나의 기업을 물려 줄 수 있는 분은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세계로 우리를 밀어 넣고 싶어 하십니다.

     

    사르밧 과부의 인생 속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생명을 주셨던 것처럼, 룻이 여자로서 아이를 낳고 생육하는 생명의 삶을 살게 하셨던 것처럼 구원은 받았지만 마음이 사단에게 잡혀서 어렵고 고달픈 삶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돌이켜 우리의 삶을 소망으로 바꾸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낳아야 할 예수님의 신부인데, 사단에게 마음을 빼앗겨 음란한 자식을 낳고 음란한 세계를 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삶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기서 이끌어 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타조에게 지혜를 품부치 않으신 것처럼 사르밧 과부에게도 기근을 이길 지혜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 여인에게 일하고 싶으셔서입니다. 이 여인에게 닥친 어려움은 네 인생 내게 맡겨, 네 가정 내가 이끌어 줄게, 네 아들 내가 키워줄게이런 뜻이 담긴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인생 속에도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십니다. 그 분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그 분의 뜻을 따라 발을 대딛는다면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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