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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동현 | 2015.03.29 21:39 | 조회 5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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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주일 낮 설교(TEXT)

     

    본문말씀[사무엘하 20:1-2, 14-16, 20-22]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다윗에게 돌아와 4년 동안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왕에게 송사할 일이 있어서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 송사가 옳다만 네 이야기를 들을 사람이 없다. 네가 옳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공의를 베풀기 원한다.’고 판결을 내려 줍니다. 그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왕을 찾아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들에게 왕은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압살롬이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라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4년 후 압살롬이 헤브론에 가서 내가 왕이다.’라고 외칩니다.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사기를 알지 못하고압살롬을 쫓는 사람이 일어납니다. ? 그냥 압살롬이 좋고 이들에게는 압살롬이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그것과는 다른 교제를 해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사르밧 과부를 불러 놓고 떡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여자가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그리하면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과부는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떡을 만들어 먼저 엘리야에게 가져다 줬습니다. 그리고 가서자기 가루통을 보니 비어있어야 할 통에 가루가 채워져 있는 겁니다. 이 여자는 지금까지는 퍼낸 가루만큼 가루가 줄어든다는 것만 알고 살았습니다. 가루가 줄어들수록 생명도 짧아져 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엘리야는 자기의 감정이나 인생관, 경험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줬습니다. ?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서 자신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누가 과부인지 모르기에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하신 여자라면 알아서 따라올 거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먼저였습니다. 이 여자는 지금까지 먼저의 순위에 하나님이 두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인생의 순위에서 먼저는 자기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 순서를 바꿉니다. ‘네가 지금까지 너를 위해 살아온 결과는 바닥나는 인생이잖아. 근심을 떨칠 수 없는 삶 아니었느냐? 이제 그 삶을 먼저 나를 위해서 살아봐. 하나님을 위해서 먼저 해 봐. 그러면 하나님이 네 통의 가루를 채워 주실 거야.’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다시는 이 여자의 삶 속에 슬픔과 괴로움이 찾아오지 못하도록 합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바꿔 보십시오. 나를 위해 사는 삶을 뒤집어서 남을 위해 한 번 살아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만남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다 버리고 그 분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여인은 필사적이고 계획적으로 살았지만 근심, 고통, 염려가 끝나지 않고 그림자처럼 늘 찾아들었습니다. 수고를 할수록 고통은 더 커져갔습니다. 왜일까요? 여자가 사는 인생은 바닥이 나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 가루를 퍼 낼 때는 줄어들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가루를 퍼내니까 가루가 채워집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나오는 압살롬은 사람들에게 잘해주면서 자기를 따르게 하지만 결국 자신이 망하고 죽을 때 다 죽음으로 끌고 갑니다. 오늘 읽었던 세바도 똑같은 인물입니다. 사무엘하 20:1절에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라고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두 번째, 이새의 아들과 함께할 업이 없도다. 세 번째,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 세 가지가 '세바'가 한 이야기입니다. 백성은 마땅히 왕을 따르고, 왕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야 하는데 그걸 '세바'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세바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과 함께하지 못하도록 할뿐만 아니라 그 다윗을 쫒지도 못하게 하는 거예요. 겉으로 보면 세바는 사람을 죽이거나 사기를 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바'를 잡으라는 특별 명령이 떨어졌고, '세바'는 다윗 왕을 피해 아벨성에 들어가 숨었습니다. 요압이 군사를 거느리고 성 밖에 진을 치고 토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성 밖을 빙 둘러서 토성을 한참 쌓고 있는데 이 성안의 어떤 지혜로운 여자가 요압과 대화를 합니다. 그 대화를 통해 여인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를 가지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세바' 잡기 작전을 펼쳤습니다. 결국 '세바'를 잡아 그 목을 잘라 성 밖에 던졌습니다. 요압이 '세바'가 목이 잘려 죽은 걸 확인하고, 토성 쌓는 것을 그치고 군사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아벨성이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기업은 바로 우리의 몸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셔서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여 에덴동산에 옮겨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다스리고 지키지도 못한 채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벨성 안에 '세바'가 아무도 모르게 숨어 들어와 살고 있는 것처럼 이 인간 아담의 몸속에 무엇인가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요압은 이 성안에 '세바'가 숨어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성 안에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세바'가 들어와 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속에 죄가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죄가 있는지 모를 뿐더러 아직도 죄가 뭔지 모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죄는 범죄 정도의 수준에 그치지, 내 안에 존재하는 마귀의 사상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은 채 각각 자신의 옳음에 잡혀 여전히 자기를 믿고 삽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죄가, 사탄이 우리를 완벽하게 속여 버렸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고자 하는 마음을 넣었다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고자 하는 마음을 넣어서 은 30냥에 유다가 예수를 팔았습니다.

    요한복음 13: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마태복음 27:3~5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 이야기 속에는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고자 한 생각을 넣어준 이후에 유다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록 되어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면서 욕을 얻으며 채찍질을 당하면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예수 판 것을 뉘우칩니다. 그래서 예수를 판 값으로 받은 은 삼십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갖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합니다. , ‘내가 잘못했다. 내가 예수를 팔았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유다는 자기가 예수를 팔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사울과 사무엘의 대화 속에서 사울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때 사무엘이 그러면 왕이여 내 귀에 들리는 저 짐승의 울음소리는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 하였나이다

    20절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다.’ 라고 대답합니다. 사울왕은 자기 입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이 말이 뭐가 잘못된 지를 전혀 감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울고 있는 저 짐승을 왜 가지고 왔어?’ ‘그거 내가 한 거 아니야. 나는 안했어!’ 이런 식의 대화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사무엘이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당신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했다.’ 고 하시면서 사울 왕을 버립니다. 하나님이 왜 사울 왕을 쓸 수 없는지 신앙의 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유다가 뉘우치고 돌이켰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음으로 끝을 냅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 ‘내가했다고 하는데 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내가 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속여 놨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여러분이 보는 게 아닙니다. 마귀가 보고, 마귀가 생각하는데 그걸 내가 본 것처럼, 내가 판단한 것처럼 나를 속여 놨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내가 지려고 합니다. 내 앞에 있는 저 카메라가 제 목을 자르고 찍으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카메라 잘못입니까? 아닙니다. 카메라는 잘못이 없습니다. 나를 비출 때 내가 제대로 나오고 안 나오고는 기계가 아니라 카메라를 잡고 있는 사람에 의해 결정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잡고 있는 것이 그렇게 만든단 말입니다. 성안에 '세바'가 들어와 있는 것처럼 내 마음에 사탄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걸 보고 죄가 있다 말합니다. 악하다고 말합니다. 거짓되다 말하고 행악의 종자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겐 선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잘못한 것으로 나를 죄인이라고 말하고 내가 잘한 것으로 나를 옳은 사람이라 여깁니다.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넣어준 생각이 유다를 지배하고 끌고 다녔습니다. 그 생각이 예수님을 팔게 하고, 유다를 정죄하게 했습니다. 그 생각이 유다를 뉘우치게 하고, 목매달게 했습니다. 껍데기는 예수님 제자인데, 생각에 끌려서 말하고 행동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바입니다. 세바는 반드시 처단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 안에 세바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 성 안 사람들은 세바가 들어와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요압이 알려주지요? 요압은 율법의 그림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알게 해 준단 말입니다. 말씀이 내 안의 죄를 적발하고 내 안의 사상이 잘못된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악인 것을 발견할 때 거기서 내가 돌이켜집니다. 그러면 그 악이 무엇입니까? 내 안에 숨은 사상, 내 마음을 잡고 있는 생각, 내 안의 죄란 말입니다. 유다 마음에 들어와 있는 생각이 유다를 그렇게 살게 했던 것처럼, 내 안에 있는 죄가 나를 형편과 문제 앞에 어려워하게 하고 죄를 짓게 합니다. 이게 로마서 714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가 나로 죄를 짓게 한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법이 죄의 법으로 나를 몰아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가기 싫은데 끌려가고 있다는 겁니다. 유다의 마음을 잡은 생각이 예수를 팔 마음을 넣고 팔게 만들었습니다. 그럼 전부다 누가 한 겁니까? 표면적으로는 다 유다가 했습니다. 유다가 찾아갔고, 의논했고, 흥정했고, 예수님 잡는 걸 도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찾아가게 만들었어요? 마귀가 넣어준 생각이 유다에게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줬고 그 생각을 따라 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마귀가 유다를 그렇게 만들고 자기는 쏙 빠졌습니다. 이 마귀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어보라고 예수님도 시험하는데, 예수님은 요동하지 않으셨습니다.

     

    마귀에게 잡히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제가 구미에 있을 때 보따리를 쌌던 적이 있습니다. 짐을 다 싸놓고 떠나려고 하는데 아들이 와서 보고는 박목사님 사모님께 일렀습니다. 그날 목사님이 영상채팅하시다 말고 전화를 하셨는데, 목사님과 전화로 대판 싸웠습니다. “누가 네 마음대로 가? 올라와서 정식 절차를 밟아.” “언제부터 그런 제도가 생겼나요?” “지금!” “누구 맘대로요? 목사님 마음대로 다 합니까?” “당장 올라와서 해.” “못가요.” 이러면서 싸웠다니까요. 마귀에게 속으면 어쩔 수 없어요. 사르밧 과부가 자기 생각을 따라 죽음으로 가고 있는데, 엘리야가 이 여인에게 말씀을 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은 여인은 죽음의 문턱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지는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합니다. 성 안에 '세바'가 들어 온 이상 이 성은 무너져야 하는데, ‘세바가 처단되니까 성이 무너뜨림을 당하지 않고 끝이 납니다.

     

    우리는 왜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면서 고달픈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말씀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데 왜 기쁨이 없습니까? 우리에게 기뻐할 조건이 있어야 기뻐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게 만들어놨습니다. 내 형편이 감사할 조건이 있어야 감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감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놨단 말입니다. 내가 보는 눈에 어려우니까 어려워하고 힘드니까 힘들어하고 슬프니까 슬퍼한다면 이게 무슨 하나님 믿는 사람입니까? 말씀은 감사해라 기뻐해라 즐거워해라 그러면 우리에게는 슬퍼할 일이 있습니까?

     

    요한 일서 2: 14-17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세상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에, 그걸 쫓고 사랑하는 것은 죄입니다. 유다가 예수를 팔려는 생각이 마귀로부터 온 것임을 알지 못하니까 그걸 받아들이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입었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고 자기 생각을 믿고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 속에 생각을 넣어 주면 그 생각에 끌려가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 제자도 마귀가 생각을 넣어주니까 예수님 팔아버리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마음을 따라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생각이 올라올 때 그 생각을 내 놓고 주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구원 받은 형제 자매들과 마음으로 교제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생각에 끌려가지 않게 됩니다.

     

    유다는 이런 생각이 들어 왔을 때 예수님이나 제자들을 찾아가지 못하게 하고 그 생각을 따라 발을 디디고 진행하게 만듭니다. 사단은 말씀을 좇아가야 할 우리를 속여 세상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게 뭐 대수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의 것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우리는 유다가 가는 길을 가야하는 겁니다. 그 길을 가면서도 틀린 줄도 모르고 잘못 된 줄도 모릅니다.

     

    사단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신을 지키려는 마음을 넣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우리 속에 넣어 주고 싶어 하는 게 있는데, 창세기 24장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아브라함과 60여년을 같이 살면서 아브라함을 섬기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늙은 종의 마음이 버려지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들어와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의 며느리를 구해오는 일 앞에서 늙은 종은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 합니다. ‘주인님 내가 가서 며느리 될 여자를 데려오려고 하는데, 만약 여자가 안 따라오면 이삭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서 보여준 후에 여자를 데리고 올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삼가 그리하지 마라고 그 마음을 잘라주고 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셔서 지금 이 땅을 나와 내 후손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너보다 앞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셔서 내 아들의 아내 될 여자를 준비하실 것이다 너는 가서 그 여자를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 네가 데려오지 못하면 너와 이 약속은 상관이 없는 것이다고 교제를 해 줍니다. 늙은 종의 마음에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 판단을 믿고 있는데, 아브라함은 그 마음을 확 뽑아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심습니다. 그래서 늙은 종의 마음이 바뀝니다. 그래서 늙은 종은 이삭의 아내를 데리고 오는 믿음의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 마음에 넣어준 마귀의 생각을 뽑아내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57절에서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 생각을 버릴 수가 있을까요?

     

    사무엘상 15장에는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고 말씀을 전해준 후에 사울을 따라 가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여전히 사울로 인해 슬퍼하고 앉아있습니다. 왜 사무엘이 슬퍼합니까? ‘사울은 참 귀한 사람인데 잘 붙잡아 주면 좋을 텐데......’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무엘에게 내가 이미 그를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사무엘이 그 음성을 따라 베들레헴에 가서 제사하는 자리에 이새와 그 아들들을 청했습니다. 첫째 엘리압을 보자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붓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사무엘이 둘째, 셋째를 보면서도 하나님께서 이도 택하지 아니하셨다면서 통과 시킵니다. 마지막에 다윗이 왔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합니다. 사무엘은 자기가 볼 때 합당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종이니까 내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 기름을 붓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럼 사무엘이 자기 판단과 자기 생각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무엘은 사무엘상 15장에서 사울을 버렸고, 16장에서는 자신을 버렸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내 마음의 죄가 끝나려면 내 자신이 버려져야 합니다. 자신이 버려지지 않으면 자신의 판단, 자신의 소리를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내가 죽고, 내 안에 있는 죄도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마귀도 끝이 나고 나를 끌고 가던 마귀가 끝이 나면서 이제는 내 안에 예수가 들어와 계시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믿고 사는 삶이 아닌 그 예수를 믿고 사는 삶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자기를 믿고 자기 것으로 육신의 아브라함은 섬길 수 있지만 아브라함속에 있는 하나님과 함께 하려면 절대 그 마음으로는 안 됩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마음을 가지고 예배당에 나와 예배는 드릴 수 있어도 믿음의 종들과 같은 길을 갈 수 는 없습니다. 그 길은 여러분의 마음을 끝을 내야만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타는 자동차는 그 차가 10년이 됐든 20년이 됐든 조작하는 대로만 움직이는데, 여러분은 누구에 의해 움직이며 누구의 영향을 받고 삽니까? 유다가 그 마음에 생각이 들어 온 날부터 그 생각에 끌려 다니듯이 내 안에도 세바라는 죄가 있으며, 이 죄가 바로 생각인데, 이 생각은 육신과 결탁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6-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모든 것을 허비하고 돼지 치는 일을 하면서 쥐엄 열매로도 배를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둘째 아들은 내 아버지 집에는 품군도 풍족한 양식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나를 믿었던 생각의 결과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생각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구나! 이 사실을 발견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의 정체를 언제 알게 됩니까?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생각의 정체를 발견한 순간 그는 살기 위해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품군의 하나로 받아달라는 아들의 소리를 무시하고 아버지는 이 아들을 위해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줍니다. 품군이 아닌 아들의 위치에서 당당하게 누리고 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지금도 나는 안 돼,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생각에 끌려 다니면서 허우적거리고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고 생각에 끌려 다니는 것이 죄입니다. 가룟유다가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죄이며,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베풀어 놓으신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를 속여 말씀이 아닌 생각을 받아들이게 속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사단에게 속지 않고 지킬 수 있을까요?

     

    시편119:9-11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이 말씀은 인간의 어떤 방법으로도 나를 지킬 수 없으니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말씀만이 나를 지켜 줄 수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생각은 나를 죽게 만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지켜 줍니다. 여러분과 내가 보존을 받고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대하시고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마음 안에 말씀을 두십시오. 그 말씀은 여러분을 치료하고 생명의 세계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아벨성에 들어온 세바를 내 놓지 않으면 아벨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듯이 우리 속에 있는 생각이 처단되지 않으면 생각에 끌려가 죽게 됩니다. 아벨 성안에 숨어들어 온 세바를 내어 놓을 때 아벨성의 모든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을 내 놓으면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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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주일 낮 설교(2015.07.19) 김민주 2015.07.19 5880
    51 주일 낮 설교(2015.07.12) 김민주 2015.07.12 6608
    50 주일 낮 설교(2015.07.05) 김민주 2015.07.05 6030
    49 주일 낮 설교(2015.06.28) 김민주 2015.06.28 5912
    48 주일 낮 설교(2015.06.21) 김민주 2015.06.24 6452
    47 주일 낮 설교(2015.06.14) 김민주 2015.06.24 6099
    46 주일 낮 설교(2015.06.07) 김민주 2015.06.07 6298
    45 주일 낮 설교(2015.05.31) 김민주 2015.05.31 6158
    44 주일 낮 설교(2015.05.24) 김민주 2015.05.24 5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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