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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동현 | 2015.04.19 21:43 | 조회 6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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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낮 예배

    본문말씀[사무엘상 15:1~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참 쉬우면서 어렵습니다. 교회 안에서 왜 말을 안 듣느냐?’ 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이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 듣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굉장히 당황스러워하면서 이거 억지 아니야? 꼭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돼?’라며 강하게 반박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안 듣고 있을 때 뭐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데 내가 잘 듣고 있는데 잘못 됐다는 말을 들으면 격한 마음이 만들어 집니다. 평상시에 그런 마음이 만들어져서 내 안에서 많은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321절에 하나님이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폐했다는 말은 버렸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울을 버릴 수 밖에 없었을까?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왕을 세워달라고 조르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워줍니다. 사울은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조건을 갖추었으며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이 백성들 마음에는 드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사울을 왕으로 세워놓고 일을 할 수 없어서 사울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읽었던 15장에서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고, 16장에서 다윗을 세웁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버릴 때도, 다윗을 세울 때도 쓰임을 받습니다. 그런데 16장에서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때 사무엘이 하나님과 강하게 부딪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었다가 다윗을 세우는 일 앞에 들어가서는 사무일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마음으로 인해 싸우기 시작합니다.

     

    오늘 읽었던 말씀이 사무엘이 사울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이야기 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다는 것은 구원 받은 우리를 의미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사도행전 22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2:14~15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울을 다메섹도상에서 구원하신 후 다메섹 교회에 가서 아나니아를 만나게 하시면서 그 아나니아를 통해 듣게 된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나 저나, 이 시대나 옛날이나 앞으로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그 뜻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단순히 지옥에 안 가게 하려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36:24~31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31그때에하나님이 24~30절에서 약속을 다 이루셔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내 삶에 이루어지게 될 때에 내가 나를 향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내 생각을 따라 살았던 자신에 대해 수치스럽게 느끼고 부끄럽게 느끼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미워지십니까? 여러분은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나를 미워할 수 있는 시점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하나님이 약속대로 일하시는 것에 대해 내 마음의 눈이 띄어져서 보게 되고, 듣게 되고,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를 바라보고 그 음성을 들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나를 믿고 살았던 삶, 나의 논리, 견해, 상식과 지식을 따라 뱉었던 말이 정말 부끄러워지며 자기 자신이 싫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정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싶은데 안 버려지잖아요? 에스겔 3624~30절 말씀 속에는 인간에게 하라고 하는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과 안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거듭나는 문제를 놓고 교제 했는데 예수님께서 중단을 하십니다. 그리고 4장에 가면 우물가의 여인은 주님이 직접 찾아가 예수님이 말을 거시고 그 여자는 구원을 받는 이야기로 마무리가 됩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는 왜 구원을 못 받고 우물가의 여인은 구원을 받았느냐? 그 차이가 뭐냐? 이유가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는 더 이상 예수님과 대화 할 수 없는 마음이 있었고, 우물가의 여인에게는 구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이걸 발견하시면 신앙은 굉장히 쉽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24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26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굳은 마음입니까? 영어 성경에 굳은 마음은 돌같이 딱딱한 마음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나 자라시면서 여러분 마음 안에 누가 뭐라 해도 바꿀 수 없는 옳은 마음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누구 앞에서도 꺾을 수 없는 고집스러운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그 마음은 주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만들어진 마음입니다. 주님은 선도 악도 주신 적이 없는데 우리는 선을 추구하고 악을 싫어하며 삽니다. 이것이 굳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말씀을 밀어내는 굳어있고 고집스러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박희진이라는 인간 속에 있는 굳은 마음을 제하고 싶으신 겁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워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니까 그를 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버려야 하는 겁니다. 제가 사람을 저격하려고 총을 샀는데 이것이 말을 듣지 않으면 버리고 다른 총을 구해야 합니다. 어떤 총으로요? 표적을 정해 놓고 방아쇠를 당겼을 때 정확하게 그 표적을 맞추는 총을 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비싸도 버려야 한단 말입니다. 자동차를 샀는데 이 차가 시동도 안 걸리고 점프를 해도 안 걸리면 그 차는 못 쓰는 겁니다. 버리고 다른 차를 구입해야 합니다. 왜지요? 나는 시동이 걸려서 나를 태우고 다닐 수 있는 자동차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울을 기름 부어서 왕을 세웠는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5장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죄인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다 죽이라 하셨습니다. 사울왕은 그 말을 듣고 돌아가서 백성을 모아 아말렉을 진멸하러 갔고 전쟁을 치렀고 진멸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념비를 세울 만큼 대승을 거두고 기쁨이 충만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을 받은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와서 교제를 했습니다. 그런데 대화가 안 됩니다. 무슨 말을 해도 교제가 안 되는 겁니다. 사울의 첫마디가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서 죄인 아말렉을 진멸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여, 그러면 내 귀에 들리는 저 짐승의 울음소리가 어찌된 겁니까?” 사무엘이 반문을 했습니다. ‘아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백성들이 여호와께 제사 드리려고 살려서 가져온 겁니다. 저는 다만 아각만 사로잡아 왔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사무엘은 당신이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당신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했다. 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울을 버립니까? 사울과 아말렉과의 전쟁을 평가해보면 전체를 100라고 했을 때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간 것은 3분의 1에 해당합니다. 말씀을 좇아 백성을 모아 아말렉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만 따라간 것이 아니고 백성의 뜻도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양과 염소를 살려 둔 것입니다. 사울은 백성이 원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백성이 원하는 것을 치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 자신이 원했던 아각 또한 진멸할 수 없었습니다. 아각을 죽이기 전에 자기의 생각을 죽여야만 아각을 제할 수 있는데, 사울은 자기를 꺾지 못하기 때문에 아각을 죽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울의 전쟁은 30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 70은 자기의 뜻과 백성의 뜻을 따라 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30가지 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거예요. 오늘날 여러분과 내가 이런 식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7가지 안 할 걸 이야기하시면서 왜 내 말을 듣지 않았느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사울은 자기가 한 것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은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은 것을 두고 말씀하시니까 대화가 안 됩니다.

     

    삼상71-4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저는 구원받은 지 20년 동안 선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젊음을 다 받쳐 복음을 위하며 믿음으로 살아왔고 그것이 신앙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저를 간섭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한 것은 사단의 역사고 목사님이 하신 것만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라면서 대들었습니다. 그 후에 목사님이 저한테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제가 하는 사역에 대해 믿음이 아니라고 단 1%도 마음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그 말씀 앞에서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제 마음에 내 성질이 아무리 더럽고 지랄 같아도 하나님이 나를 덮으면 내 허물이 가려질텐데 누군가가 나를 문제 삼는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내 신앙에 문제를 삼고 계시는 구나, 뭔가 하나님이 불편하신 게 있어서 내 영혼을 상관하고 계시는 구나!’ 라는 마음이 드니까 사람과 싸움을 할 수 없었습니다. 새벽 4시쯤 눈을 떠서 기도하는데 기도도 안 되고 마음도 답답해서 그냥 누워있는데, 내 마음에 부딪혀오는 말씀이 있었어요. 창세기 3장의 선악과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첫 번째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일어난 역사는 눈이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밝아진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고 벗은 것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두려워서 숨게 됩니다. 그러면서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묻은 하나님이 질문 앞에 아담은 창세기 312절 처럼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본인이 선악과를 따 먹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따 먹었다고 하와를 끌어들이고 자신을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에게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범죄한 것에 대해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들에게 내려준 심판은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교류가 될 수 없는 세상으로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늘 알고 있던 이 말씀이 제 마음을 치고 들어 왔습니다. 그 말씀 앞에서 제 마음이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지금 내가 뭐하고 있지? 아담과 내가 다를 바가 없구나!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그것을 교묘하게 합리화 시키듯 그러고 있는 저 또한 나는 그렇게 안했어. 너희들이 잘못했지이런 마음으로 저는 나를 옳게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을 나쁜 사람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교회를 나쁜 쪽으로 이야기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내가 백번이고 천 번이고 옳았는데, 이 말씀 앞에 처음으로 더럽고 나쁜 새끼인 제가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단 한 번도 옳은 자로 세운 적이 없는데, 나는 선악과를 따 먹은 그 결과로 내가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단 말입니다.

    옳음은 선악과에서 나왔지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생명나무는 예수님의 그림자인데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당신을 희생하셨고 당신의 뜻을 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옳고 그름을 따진 적이 없으며 선과 악을 나눈 적도 없습니다. 당신을 꺾어서 죄인이 되었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나는 죄인이 되기 싫었고, 늘 교회 안에 옳은 사람, 가르치는 사람, 잘난 사람으로 살아왔지 틀린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내 마음은 너희들은 내 말 들어야 해이런 마음이었지 내가 누군가에게 배워야 하거나 들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박목사님께서 저에게 하셨던 나는 자네보다 성질이 더 더럽지만 아무도 나를 문제 삼지 않아그 말의 의미를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문제 삼고 있는데 사울은 전쟁을 너무 잘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기념비를 세우고 잔치를 할 만큼 전쟁을 잘 했는데 하나님은 그 전쟁을 싫어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저 또한 사울처럼 지금까지 사역을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잣대에서는 틀린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이었고 거스르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볼 만한 눈이 없었습니다. 선악의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은 옳아도 죽고 다 죽습니다. 거기에 서 있는 제 자신이 보였습니다. 내가 생명과 끊어져 있고 죄 속에 잡혀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내가 했던 모든 사역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저를 그 곳에서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 가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3624절 말씀처럼 내 안에 있는 굳은 마음을 제하고 당신의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당신의 마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드러운 마음이라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의가 없었습니다. 채찍에 맞으면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의 몸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앞에 순종하면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단 말입니다.

    입을 열어서 나는 죄인이 아니야, 너희들을 위해서 이런 모욕을 당하는 거야라고 한마디쯤 할 만한데 끝내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교회 안에 할 말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옳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굳은 마음을 뽑아내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것은 결국 대적하고 거스르는 것뿐입니다. 27절 말씀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열국중에서 취하여 내고 고토에 데리고 가서 맑은 물로 씻겨서 정결케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다시 옛날의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굳은 마음을 제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신을 주셔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보고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 스스로는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굳은 마음을 어떻게 제합니까? 성경에서는 새 영과 새 마음을 우리 안에 주셔서 우리 육신의 굳은 마음을 제하겠다고 하십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에게 예수님의 그녀를 위해 자신을 버린 예수님의 사랑과 마음이 들어가면 그 삶은 죄에서 떠나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예수의 마음을 넣어서 사랑을 넣어서 그 사랑을 깨우쳐서 그 마음을 감각할 때 우리는 그분을 버릴 수 없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예수님을 의식하게 되고 그래서 그 말씀이 내 인생을 잡아주고 바꾸어주니까 달라지고 변하는 것이지 그래서 내게 있는 굳은 마음이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뀌니까 부드러운 마음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냥 바뀌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 속에 당신의 신을 넣어서 율례와 규례를 좇아 행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감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인 만큼 삶속에서 예수님을 감각하게 되고, 그 예수님이 내 인생을 잡아주고 바꾸어 주니까 내 삶이 달라지고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굳은 마음이 제하여지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뀌니까 부드러운 마음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냥 바뀔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속에 당신의 신을 넣어 당신의 율례와 규례를 행하도록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없다는 복음은 들었지만 마음 안에 주님의 마음이 없으니까 여전히 자신의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겁니다.

     

    축구 해설하시는 분들을 운동장에 들여놓고 축구 경기 하라고 하면 잘 못합니다. 왜냐하면 해설은 할 수 있어도 발로 뛰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운동장에서 하는 것이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듯 신앙은 예배당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삶속에서 하나님을 얻어가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속여서 신앙이 아닌 종교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단의 음성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 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25:4~7)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고 했는데, 누가 악한 자입니까? 내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죽어야 할 형틀이기에 교회 앞에, 하나님 앞에 나를 빼고 살라는 것입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41:14~16)

    하나님께서 저에게 약속하신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저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를 삼아서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든다고 하셨기 때문에 저는 입만 벌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이 다 부서뜨려서 겨처럼 날려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3:14-18) 이 말씀은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서쪽은 하나님에 계신 곳을 말하고 동쪽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성막의 문은 동쪽에 있고, 법궤는 서쪽에 있습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서쪽으로 흘러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동쪽은 세상을 의미하기 때문에 동쪽을 쳐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쉬지를 못합니다. 서쪽만 바라보면 하나님이 계셔서 쉴 수 있고 좋은데 동쪽을 바라보면 문제가 많은데 하나님은 저에게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동쪽만 보지 말고 서쪽도 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를 내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골리앗이라는 문제만 쳐다보니까 너무 괴로운 거예요. 반대로 다윗은 골리앗이라는 문제도 있지만 주님이 보이니까 다윗의 마음은 형편의 지배를 당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마음으로 골리앗을 보니까 골리앗은 이미 죽어 뻗어 있는 겁니다. 다윗은 주님 안에서 문제를 보고, 주님 안에서 형편을 보고, 주님 안에서 세상을 대하고 주님 안에서 어려움을 만나니까 전혀 어렵지가 않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본 것과 내가 싸워야 했는데, 이사야411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약속으로 주신 이후로는 내가 싸우지 않고 내가 씨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허무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기에 제가 설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사야 4115절 말씀처럼 저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신다고 하셨기에 저는 입만 열면 하나님이 산 같은 부담이나 문제들도 다 부스러기로 만드셔서 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제게 이 두 가지 마음을 주셨습니다. 브라질에 가서 한 주가 수양회를 마치고 뽈뚜라는 지방도시에 가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집회를 마치고는 리오 에서도 집회를 하면서 3주 정도 남미에 체류했었는데, 뽈뚜는 약 40명 정도 모이는 교회입니다. 외곽에 자리 잡은 교회라서 그런지 한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들 어렵게 살고 있었으며 한국처럼 전도할 수 있는 곳이 개방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학교 정문은 교도소철문처럼 닫아놓고 안은 볼 수도 없습니다. 하고 할 때는 작은 쪽문으로 학생들이 나오면 보호자가 학생들을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학교 운동장은 외부 인에게는 절대 개방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학교도 그렇고 모든 학교 시스템이 폐쇄적으로 되어 있어서 어디에서도 선교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형편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뽈뚜교회 성도는 40명 정도인데 80명이 넘는 사람들이 와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전에는 집회하고 오후에는 목회자 모임을 가졌는데, 목회자들이 교제를 나누면서 구원을 받아 자기 교회로 돌아가서 집회를 개최하고 우리를 강사로 초청하는 바람에 뽈뚜교회 목사님이 집회 강사로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길을 열어 가셨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로 삼아 주셔서 나는 그냥 입만 열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감사하게도 형제자매들이 말씀을 듣고 교제를 하면서 자신들의 잘못 살아온 삶을 발견하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이 분들은 구원받고 교회 안에 그냥 머물러 살던 분들인데 교제를 통해 굳은 마음이 빠져나가고 그리스도의 새 마음이 들어와서 복음 앞에 살 수 있게 하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일하시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일을 하시는 이유는 내게 있는 육을 다 부수고 내 안에 하나님만 남겨 놓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하시는데, 사단은 그 하나님의 소리를 못 듣게 하고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듣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왕 삼으신 후에 왕은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했습니다. 그것처럼 구원받은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가 있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전해 주시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면 성경을 펴서 읽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그 마음으로 살게 되고, 그 마음이 들어오면 내게 있는 굳은 마음이 떠나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울 왕을 통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다윗을 통해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게 사단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는데, 서쪽에는 주님이 계시지만 동쪽에는 문제만 가득합니다. 어렵고 속상한 문제 여러분이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부딪히십시오. 주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앞에 부딪히는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다 부숴버리고 없애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입을 열어서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된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죄사함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남미에 가서 목사님이 저를 간섭해 주시면서 제 마음이 바뀌었던 이야기, 어려움이 있었을 때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 부딪혀 나가면서 하나님이 도우셨던 이야기를 하고 왔습니다. 리오 교회는 성도가 다해야 8명 정도 되는데 집회을 통해 말씀을 듣고 교제했습니다. 그런 교회를 보면서 소망스럽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를 새 타작기계처럼 날카롭게 하셔서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로 만드신다고 약속하셨기에 저라는 사람은 보잘 것 없고, 제 입의 말은 능력이 없어도 곡식밖에 못 터는 타작기계를 산을 부수는 기계로 만드시는 주의 능력이 입을 열었을 때 저를 통해 나타나셔서 일을 하셨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사울은 벌벌 떨지만 다윗은 믿음으로 부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앞의 문제를 부셔서 다 날려버리고 하나님 안에 살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여러분이 그 은혜를 입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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