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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동현 | 2015.04.29 13:30 | 조회 5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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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낮 예배

    본문말씀 [열왕기상 3:16-28]

     

    이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많은 뜻이 담겨 있는데, 저는 오늘 그 부분 중에 하나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직접 집을 지으면 굉장히 꼼꼼하게 집을 짓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동원해서 지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업자가 건물을 지으면 외관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온 마음을 다해 짓지는 않습니다. 건물을 짓는 사람들은 생각도 고민도 많이 해야 합니다. 마음에 형성된 집 구조가 설계 도면으로 옮겨져 그 도면을 보고 건축업자가 현장에 기둥을 세우고, 벽도 쌓고 칸막이도 해서 집을 만듭니다. 사람들은 완성된 집을 보고 나서야 , 이런 집이구나.’하고 알지만 전문가들은 설계도면만 쳐다보고도 집의 구조를 훤히 압니다. 집의 방향, 크기, 어떤 재료가 쓰이는지도 다 안단 말입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 꼭 전해주고 싶은 것을 담아 놓았습니다. 우리가 그걸 찾아야 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못합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까지는 하는데 죽은 사람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병든 자도 고치지만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점입니다. 성경이 참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과 연결이 되면 죽음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과 끊어지면 죽임이 찾아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형편은 어렵고 절망스러워도 그 속에 빠져 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가져다 두어도 죽음에 잡혀 있을 수가 없는 분입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사도행전 말씀을 읽다가 깜짝 놀란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욥바 사람 다비다가 죽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다비다의 장래를 치르지 않고 몸을 깨끗이 씻겨 다락에 뉘어 놓고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오라고 청했습니다. 베드로는 영문도 모르고 왔는데 다비다가 죽어서 싸늘한 시체로 다락에 누워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이 다비다가 살았을 때 이야기를 하면서 다비다를 살려 놓으라는 겁니다. 부활시키라는 이야기죠. 이 사람들 마음에는 베드로가 오면 죽은 다비다를 살릴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비다가 죽어서 시간이 지나고 있지만 그게 전혀 문제가 안 되고 베드로만 오면 다비다는 살아나, 다비다는 안 죽었어. 누가 죽었다고 그래?’하며 누구도 다비다가 죽은 걸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걸 보고 미친 짓이라고 하죠? 이런 사람들은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비다가 죽었으면 울어야 하는데 형편은 다비다가 숨을 멈추고 죽어서 다락에 누워있는데, 이 사람들은 다비다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베드로를 오라고 했고, 베드로가 왔을 때 기뻐하고, 감사하며, 소망이 되는 마음으로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와서 다비다를 살려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니까 나사로가 죽어서 장례를 치르고 무덤에 넣어 놨습니다.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러 나사로가 썩었고 냄새가 났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무덤에 장례를 치르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무덤에 찾아가서 죽어서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보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무덤에 놔두지 아니하고 무덤 밖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제 마음에도 들어오셔서 저를 절망이라는 무덤에 놔두지 아니하고 기쁨과 소망의 집으로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불러내시니까 나사로는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는 그 곳에서 말씀을 듣고 있고, 예수님과 함께 계속 여행을 다니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소망의 세계, 기쁨의 방, 즐거움의 집이죠? 예수님에게는 죽음이라는 세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집에는 슬픔의 방, 괴로움의 방, 고통의 방, 원망의 방이 없기 때문에 나사로를 데리고 기쁨, 즐거움, 소망, 능력의 세계, 부활의 세계로 다니시면서 나사로와 함께 행복하게 사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나를 무덤에 데려다 놓지만 주님은 나를 무덤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 놓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그 세계로 이끌어 가고 싶으신데 그 주님을 내가 싫어하고, 내 집에 들어오는 걸 막으니까 내 마음에는 즐거움, 기쁨, 소망, 행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비다가 죽었지만 베드로가 오면 살아나는 것처럼, 나사로가 죽고 썩어서 냄새가 나지만 예수님이 오시면 살아나게 되듯, 내 마음은 온통 원망, 불평, 고통,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내 안에 주님과 말씀이 들어오면 그 말씀이 나를 거기 두지 아니하고 이끌어 내십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서 두 여자 가운데 한 여자는 틀림없이 가짜입니다. 그런데 우린 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릅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달걀을 못 세워서 끙끙거리니까 콜롬버스가 달걀의 아래를 탁 깨서 세웠습니다. 보고 하는 것은 쉽지만 사람들이 고정된 관념을 깨트리고 달걀을 깨트려서 세우는 걸 생각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A4용지를 나누어주면서 비행기를 접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칠판에다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동그라미 안에 비행기를 날려 보내는 학생에게는 점심을 사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전부 비행기를 접어서 날렸는데 아무도 동그라미 안에 비행기를 못 넣었습니다. 그때 교수가 하는 말이비행기가 너희들이 접은 것처럼 날개가 있으라는 법은 없다. 야구공처럼 둥글 수도 있고 벽돌처럼 네모반듯할 수도 있는 거지.’라고 하면서 종이를 구겨 동그라미 안에 던져 넣었습니다. 교수님이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학생들 머릿속에 있는 관념을 깨트린 거죠. 사람들은 자기 관념 속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니까 자기와 안 맞는 건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이 성경 속에서 두 여자중 하나는 분명하게 가짜인데 둘 다 이 산 아이의 엄마는 나야! 아냐, 너는 죽은 아이의 엄마고 내가 산 아이의 엄마야.”라고 싸웁니다. 부부들이 싸우는 이유는 서로 자기가 옳아서입니다. “여보 남편. 네가 맞고 내가 틀렸다, 싸우자!” 그러면 싸움이 되겠습니까?

     

    이 중 진짜 엄마는 나쁜 여자에게 절대로 자기의 아이를 안 빼앗기려고 사생결단을 하면서 달려듭니다. 이런 나쁜 여자가 어디 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생명을 걸고 아들아! 너를 지켜줄게.’생모는 온 마음을 다 쏟아서 아이를 뺏어가려고 하는 가짜 엄마로부터 자기 아이를 지키려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이 결론이 나지 않으니까 왕 앞에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왕은 칼로 아이를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이 엄마에게 주고 한쪽은 다른 엄마에게 주라고 합니다.

    산 아이의 엄마는 왕 앞에 가면 자기 아이를 찾을 거라고 믿었는데 왕은 아이를 죽이라고 합니다. 이 여자는 아이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싸우고, 버티고 왔는데, 그 결과는 솔로몬의 칼날 앞으로 자기의 아이를 내 모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처음부터 이 여자가 자기 아이를 포기했다면 비록 아이는 빼앗겼겠지만 이 아이는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지키려고 했던 결과는 자기 아이를 죽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솔로몬의 칼날 앞에 섰을 때 발견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심판 앞에, 칼날 앞에 서보니까 이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기 아이를 죽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두 여자는 똑같은 마음을 품고,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산 아이가 내 아이고, 죽은 아이가 저 여자의 아이입니다.”

    그런데 왕이 이 아이를 둘로 나누자고 한 그때부터 이 두 여자 입에 나오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326절에

     

    그 산 아들의 어미 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생모 즉, 진짜 엄마만 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가짜 엄마는 이 말을 절대 못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 있는 것처럼 생모만 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한 여자는 산아들을 저에게 주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라고 하지만 다른 한 계집은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라고 합니다.

    이전까지는 두 여자의 말이 똑같았는데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반씩 주라하니까 그들 입에서 서로 다른 말이 나옵니다. 하나는 왕의 판결을 따라 고하지만, 하나는 왕의 판결을 가로막습니다. “안 됩니다. 그 아이를 죽이지 마십시오. 저 여자한테 아이를 주십시오. 내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내가 죽일 년입니다.” 이 여자는 아이를 포기하고 대신 자기가 죄인이 되어 죽음으로 갑니다.

     

    여러분, 장사익이 부르는 꽃구경 가자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아들 등에 업혀서 산에 버림받으러 가는 어머니가 아들이 홀로 돌아가는 길을 잃지 않도록 표시를 해둔다는 내용입니다. 꽃구경 가자는 아들 말에 어머니는 좋아서 아들 등에 업힙니다. 골목을 지나고 마을을 지나 꽃이 활짝 핀 산기슭을 지나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어머니는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는 아들이 당신을 버리러 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는 아들 등에 업혀 가면서 솔잎을 한 움큼씩 따서 길가에 버립니다. 아들이 그걸 봤습니다. “어머니, 솔잎은 따서 뭐한대요?” “니가 홀로 돌아갈 때 길을 잃을까 두렵구나.”어머니는 당신이 버려지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아들이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것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위해서 솔잎을 따서 길 위해 표시를 해 둡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솔로몬의 칼날 앞에 있는 아들을 살리는 데는 희생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아들 대신 솔로몬의 칼날을 맞게 합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침 뱉음을 당하고 짓밟힘 당할 수 있는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 된 겁니다. 이는 사단에게 잡혀서 심판을 받아 저주와 멸망을 받고 죽음으로 가는 우리를 살려내는데도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그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음을 말합니다. 여러분과 나를 위한 하나님 사랑이 당신을 죄인 되게 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한 겁니다.

     

    여러분, 껍데기는 쳐다보기도 싫게 너무너무 더러운 포장지인데, 그 안에 있는 그 사랑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고귀한 아름다운 사랑을 담아놓은 그림이 오늘 읽었던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은 박희진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이 죄인이 되시고요, 당신이 침 뱉음을 받으시고요, 당신이 채찍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고통과 수모와 멸시와 천대를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산 겁니다. 이 여자는, 아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자신이 죽는 길 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 내가 옳은 여자가 되면 아들이 죽는구나.’예수님이 율법 앞에 죄인된 것이 죽어야 할 박희진을 살게 한 겁니다. 이 여자는 그걸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여자는 자기 옳음으로 아이를 지키려고 했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내 아들이야!’그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명백한 사실일지라도 심판 앞에서는 죽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옳아도, 내가 아무리 잘나도, 내가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우리는 죽어야 됩니다. 이 여인이 아들을 위해서 죽어야 아들이 살아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길을 예수님에게 담당을 시키셨습니다.

     

    , 성경 몇 군데만 찾아보겠습니다. 여러분,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란 여자가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십시오. 다윗이 어느 날 나발의 집에 나발이 양털을 깎고 할 때에 사환을 보내서 음식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발이 다윗의 종들을 심하게 모욕을 해서 보냈습니다. 다윗이 화가 나서 나발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이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칼을 차고 나발의 집에 있는 사람을 다 죽이려고 지금 내려오고 있죠? 그런데 성경이 나발에 대해서 뭐라고 소개 하냐면, 나발은 미련하다고 되어있습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도 자기 남편이 늘 못 마땅합니다. 그런데 나발이 미련하고 완고하여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자라고 하면서도 잘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지요? 나발에게서 나오는 것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직장 싫다고 막 투덜거리고 사장이 짜다고 흉을 보면서도 버티고 있는 이유는, 명절이면 가끔씩 보너스도 주니까 그렇잖아요. 이 아비가일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어렵고 부담스럽고 안 좋지만 그래도 살만 하니까 같이 사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윗이 나발의 집을 치러 온다는 소식을 사환이 듣고 아비가일에게 알려주었습니다. 9절 보십시오.

     

    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사무엘상 911)

     

    이 말을 들은 다윗의 사환들이 돌아가서 다윗에게 그대로 이야기를 합니다. 12.

     

    이에 다윗의 소년들이 돌이켜 자기 길로 행하여 돌아와서 이 모든 말로 그에게 고하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사무엘상 12, 13)

     

    다윗이 칼을 차고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지금 나발을 향하여 올라갑니까, 안갑니까? 그럼 다윗 편에서 나발은 이미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다윗의 마음에서는 나발이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지요? 그걸 누가 알았냐면, 14절에

     

    소년 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사무엘상 1417)

     

    다윗이 주인과 주인집의 모든 자를 죽이려고 결정했다 그 말입니다. 다윗의 마음에서 결정된 소식을 사환이 나발의 아내 되는 아비가일에게 전해 줬습니다. 조금 있으면 다윗이 군사를 데리고 올 것인데, 그러면 나발도 죽지만 당신도 죽고 나도 죽고 우리 모두 다 죽는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당신이 결정을 해라. 그 말입니다. 살고 싶으면 살길을 찾아가고 죽고 싶으면 앉아 있다 죽으라는 말입니다. 살고 싶으면 성경보고 답 찾아가고 죽고 싶으면 그냥 앉아서 예배 드리고 꾸벅꾸벅 졸다가 집에 가면 됩니다. 나발은 이미 죽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발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 역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나발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나발의 집에 있기 때문에, 나발과 함께 있기 때문에, 나발 때문에 결국은 죽는다 그 말입니다. 맞죠?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에 결국은 죽어야 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이 친구가 아비가일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17절에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찌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어떤 사람이라고요?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그래서 이 사환이 아비가일에게 그 소식을 전합니다. 아비가일이 그 심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아비가일이 뭘 하는지를 보세요. 18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송이와 무화과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 소년들에게 이르되 내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 남편 나발에게는 고하지 아니하니라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사무엘상 25 : 18 - 25)

    아비가일은 다윗의 칼날을 피할 수 있는 길과 방법이 없기 때문에 죽어야만 합니다. 아비가일은 살려고 나발을 버리고 다윗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화친을 청하는 겁니다. ‘내 남편 나발은 불량한 사람입니다. 미련한 사람입니다. 더불어 말 할 수 없는 자입니다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지금까지 나발과 살았는데 이제 보니까 그 나발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이런 뜻입니다.

     

    아비가일이 남편과 함께 살 동안에는 남편을 미련하다고 판단했었는데, 다윗의 칼날 앞에 자신을 세워보니까 나발만 미련한 것이 아니고 자기도 미련하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선과 악을 아는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선과 악을 아는 열매를 따 먹은 이후 사람들에게는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 선악의 기준으로 대합니다. 너는 육신적이고 나는 영적이고 이렇게 사람을 나눕니다. 그런데 말씀 앞에 서 보면 선한 나도 죽어야 하고 악한 너도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옳은 사람으로 세운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악하다고 하시는데 본인이 옳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위에 있는 사람이에요. 아비가일은 지금까지 늘 지혜롭고 옳은 여자로 살았는데, 다윗의 칼날 앞에 자신을 세워보니까 죽음이 코앞에 닥친 겁니다. 나발 곁에 있으면 죽기 때문에 나발을 떠나 다윗에게 속해 버립니다. 산아들의 어미 되는 창기는 솔로몬의 칼날 앞에 서기전까지는 옳은 자였는데, 솔로몬의 칼날 앞에 섰을 때 그 자리는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열왕기하 7장의 네 명의 문둥이는 성 밖에 살면서 성에서 주는 음식으로 견딜 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에 기근이 찾아오니까 그 곳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죽음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성 안에 기근이 오자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씩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귀는 부정한 음식이라 먹지 않는데, 기근이 심하니까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성 안 사정이 이러한데 성 밖에 있는 문둥이들에게는 당연히 양식이 공급되지 않는 것입니다. 닷새를 굶고 열흘을 굶주리자 이들은 아람 진으로 갈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둥이들은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그 자리가 죽음의 자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발견하자 그 곳을 떠난 살지도 죽을 지도 모르는 아람 진을 향해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풍족한 양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1981년도에 구원받고 25년이 넘도록 사역하면서 젊음을 다 쏟아서 복음 앞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충만하고 감사한데 나의 스승 되는 목사님은 내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분해서 씩씩거리는 내게 창세기 3장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선악을 아는 열매를 따 먹고 난 이후 사람들이 하는 일은 옳고 그름을 나누는 것이었는데, 제가 바로 그렇게 살고 있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선악을 아는 열매를 먹으면 옳아도 죽고 틀려도 죽습니다. 내 앞에 죽음이 와 있는데, 그것도 모른 채 내 자신이 옳다고 핏대를 올리는 내 모습이 보였습니다. 25년이 넘게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제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고 야비하고 더러웠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형제자매들 앞에서 틀린 사람이 되어 본적이 없습니다. 나는 항상 옳았고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비가일이 옳은 사람으로 사는 것을 너무 싫어하셔서 나발을 죽일 때 아비가일도 같이 죽이려 하셨습니다. 저 또한 창세기 3장의 말씀을 통하여 죽음의 자리에 있는 제 자신을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세계 안에 계신 우리 주님은 당신이 죄인이 되어 채찍을 맞으시고 침뱉음을 당하면서 당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나는 옳은 사람이 되어 온 천지를 뒤집고 살아왔단 말입니다. 그때 내 마음에서 나를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산 아이의 어미 되는 창기가 솔로몬의 칼날 앞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습니다. ‘그 아이를 죽이지 마시고 저 여자에게 주소서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이 아이의 엄마가 아닙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죽이시고 저 아이는 살려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그런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심고 싶어 하십니다. 세포질 속에 들어 있는 소기관으로 세로 발전소에 해당하는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질 유전에도 관여하는데 평상시에는 에너지 대사에 관여하다가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되면 생명을 사랑하는 유전인자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신한 여자의 마음속에 태아를 향한 사랑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조 속에, 또는 미물 속에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을 감추어 두셨습니다. 미련한 인생들이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두 창기의 이야기 속에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 있는 여러분의 자리가 죽음의 자리인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생명의 자리인지 비춰보십시오. 혹시라도 여러분이 옳음의 자리에 앉아있다면 여러분을 내려놓고 이 창기처럼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십시오. 그러면 여인도 살고 아이도 삽니다.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 가면 예수님은 우리를 그 곳에 그냥 두지 않습니다. 우리를 생명의 자리로 옮겨 놓으신단 말입니다. 아들을 놓아 버리니까 아들을 돌려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이 붙잡지 마십시오. 이 여자처럼 놓으면 예수님이 가져다주십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무덤속의 나사로를 찾아가셨던 것처럼 우리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찾아오는 당신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접목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죽음과 절망이 아닌 생명과 기쁨의 세계로 옮겨와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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