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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동현 | 2014.11.03 19:37 | 조회 6730

    본문 말씀: 고린도 전서 15:45

      이 말씀은 짧지만 굉장히 의미가 있고, 많은 걸 마음에서 묵상하게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 아담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치밀한 계획과 분명한 뜻을 가지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즉 살아있는 영이라는 겁니다. 이건 다른 말로 죽을 수도 있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만든 목적이고 계획입니다.

    2장 7절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2장 15절-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선과 악을 아는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뱀의 말을 듣고 하와가 선, 악을 아는 열매를 쳐다보니까, 뱀이 하는 말처럼 그 열매가 지혜롭고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로 인해 여자에게 내린 심판이 4가지가 나오는데 남편의 다스림을 받고, 남편을 사모하게 되고, 잉태하는 고통을 더하고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거라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네가 땅을 파고 일구나 땅은 네게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며,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심판으로 인해 그 때부터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결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 육신에 우리는 애착을 가지고 마음을 쏟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 이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아담은 나를 죽음과 슬픔, 문제로 나를 몰아넣지만, 마지막 아담은 나를 살려주는 일을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마지막 사람 예수를 만나면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사망과 슬픔, 고통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시면서 하셨던 이야기가 성경에 참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하기를‘주여 물이 동할 때 나를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가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저는 길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낫고 싶지만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물이 동한다 해도 이 친구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주님이‘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고 했고 말이 떨어지자마자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를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지만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을 때에는 주님은 내게 어떤 일도 행하실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때에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식물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식물에는 성장 세포가 있고 영원히 죽지 않는 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세포를 보고 ‘이모탈 셀’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개가 공존을 하는데, 두 세포가 같이 있으면 식물이 죽습니다. 성장세포가 죽을 때에 이모탈 셀도 죽습니다. 그런데 이모탈 셀을 뽑아내서 성장 세포에게서 분리시켜 놓으면 성장 세포는 죽어도 이모탈 셀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모텔 세포(immortal cell)는 복구하는 세포라고 하는데, 식물이 상처가 날 때 진액이 나와서 상처를 회복시키는 일을 이 세포가 합니다.

    어린 학생들로부터 시작해 나이가 많이 드신 어르신까지 나름대로 자기의 옳음이 반듯하게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옳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쁜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될 때 인상을 찌푸리게 되고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에 옳음이 없으면 무슨 말을 들어도 반응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의 마음에 옳음을 넣어준 적이 없습니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보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준적이 없는데,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너무 잘 보고 너무 많은 것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는데 할 수 있다는 것은 마귀가 그 속에 앉아 있어서입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은 우리 속에 진리를 넣어준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을

    66권의 말씀에 비춰봐서 말씀과 다른 나를 꺾어야하고, 내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반대로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세우기 위하여 상대를 꺾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사단에 속해 있는 사람이에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8,19)

     

    성경에서 예수님은 살리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이 결정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내 자신이 아무리 옳아도 나는 영원히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는 가시 엉겅퀴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나에 대해서 그렇게 심판을 내리셔서 심판대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 속에 하나님은 예수님의 영을 보내주셨습니다. 죽음이 결정되어 있는 식물일지라도 그 안에 있는 이모텔 셀(immortal cell)을 분리시켜놓으면, 이 세포는 죽지 않고 사는 것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예수님을 만나면 살아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는데,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갔는데 그 친구를 예수님이 찾아와서 만납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살려놓습니다. 예수님이 이 친구를 살린 것이지, 이 친구가 뭘 해서 살아난 게 아닙니다. 이 친구는 죽도록 두들겨 맞았고 빼앗겼고 버려진 것 말고 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때에 예수님이 찾아와서 이 친구를 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죽지 않는 분이고 살리는 영이란 말입니다.

    식물에 있는 세포를 말하면 이모텔 세포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옳음과 정직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죽고 없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이런 내가 죽어갈 때에 죽지 않는 예수님이 나를 찾아와서 나와 함께 해주시면 그 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단 말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만나야 삽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병에서 낫고 귀신에게서 벗어납니다.

    그 분은 살리는 영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그 예수를 통해서 죽음에서, 병에서, 귀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자기 옳음이 존재하고 있을 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예수님 앞에 끌려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여자를 보고 ‘이 여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돼. 모세의 법에 간음한 여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돼. 죽여, 죽여!’전부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고 난 이 후 아무도 이 여자를 돌로 치지 못하고 그냥 다 돌아갔습니다.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 앞에 자기를 비추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법 앞에 이 여자를 비추어서 나쁜 여자, 돌에 맞아 죽을 여자라고 낙인을 찍을 수는 있었지만, 자기를 비추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는 옳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옳음이 여자를 끌고 와서 돌로 치려는 마음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모세의 법을 이용한 거지만 이들 마음에는 저마다의 옳음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 옳음이 여자를 끌어와 심판하고 있는 그들에게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옳음이 있는 상태에서 말씀이 들려졌는데, 말씀이 일을 못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떠나야 하는 거예요. 말씀 앞에 제대로 서면‘내가 틀렸구나. 내가 옳은 사람이 아니구나. 저 여자는 죄를 지어서 잡혔지만 나는 죄를 짓고도 안 잡힌 놈이구나. 진짜 돌에 맞아 죽을 놈은 나구나!’ 제대로 말씀 앞에 서 본 사람은 이런 마음을 가진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옳음이 세워져 있기에 양심에 가책은 받지만 떠나버리는 거예요. 하지만 이 여자는 옳음이 없어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들어가니까 이 여자가 죄에서 벗어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씀이 이 여자를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들어 줍니다.

    38년 된 병자 또한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라고 대답하는 병자에게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하셨습니다. 이 병자에게 말씀이 들어가니까, 말씀이 38년 된 병자를 끌고 갑니다. 그 말씀이 자리를 들게 하고, 일어나 걷게 하고, 이 친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의 38년 된 병자에 대한 말씀은 어제도 읽었고, 오늘도 읽는데 왜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걸까요? 우리가 말은 38년 된 병자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마음에는 자기 옳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올 때마다 옳음과 말씀이 섞여버려 말씀이 일을 못하는 거예요. 영원히 죽지 않는 세포가 성장 세포와 같이 있으면 죽어야 되지만 분리시켜 놓으면 사는 것처럼 예수님은 나하고 같이 있으면 아무 일을 못합니다. 예수님은 내 옳음과 같이 있으면 아무 일을 못해서 내가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일을 합니다. 강도 만난 자가 옷이 벗겨지고 거반 죽어 갈 때,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주님이 일하십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살리고 싶어 하시는데, 나는 내 옳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니까 이 말씀이 일을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이 옳음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6:14절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어떤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쌔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대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세례 요한 당시 분봉왕으로 있던 헤롯이 자기 동생의 처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런 왕을 보고 세례요한이 책망을 하는데, 세례 요한의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반대로 집에 돌아오면 헤로디아에게 속아서 또 넘어가는 거예요. 세례 요한의 말을 달게 듣지만 못 돌이킵니다. 왜냐하면 왕의 마음에 헤로디아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이 헤로디아를 사랑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동안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세례 요한의 말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처럼 내 마음에 헤로디아와 같은 옳음이 있는 동안에는 말씀을 들어도 말씀이 일을 못합니다. 내가 나의 정직함, 나의 옳음을 사모하는 동안에는 말씀을 듣고 있어도 말씀이 절대로 일을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내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 육신이라는 헤로디아입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끌어안고 품고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무슨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여러분을 못 이끌어줍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악하다는 것도, 내가 마귀라는 것도, 또 내가 거짓된 것도 압니다. 또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도 아는데 못 버리는 겁니다.

     

    내가 우리 대학생들을 간섭하는데 고맙게도 그 애들이 제 말을 듣습니다. 어제 아침에 어떤 여학생 보고 뭐라고 하니까 마음 바꾸고 자세 바꿔서 오더라고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옳음을 꺾어버리니까 삶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 마음 갖고 살면 말씀이 우리를 바꿔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헤로디아와 세례 요한 둘 다 끌어안고 있어서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죽지 않는 분이지만 내 옳음 속에 들어와서는 일을 못하시고 그것이 끝났을 때 주님이 주님의 방식대로 나를 살리고, 걷게 하고, 듣게 하고, 벗어나게 합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귀신들린 친구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역사는 그들 자신이 끝났을 때 일어납니다. 그 때 주님이 돌아와서 그들을 풀어주고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귀신에서 벗어나고 병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데, 여러분은 오늘 예수님과 만나고 있는데도 왜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의 눈을 못 열어주고 길을 못 열어주십니까? 내 옳음이 말씀을 죽이고 있는 겁니다. 그 옳음이 오늘도 말씀을 짓밟고 있는 겁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왕의 신상 앞에 절 하는 것을 거절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왕이 풀무 불에 집어넣는다고 해도 그들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금 신상에게는 절하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정하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졌는데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말씀 말고는 그 어떤 인간의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이 살아서 힘 있게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똑같이 그 말씀을 알고 깨닫기는 하지만 내 안에 또 다른 인간의 방법이 있고 옳음이 있어서 거기다 말씀을 끌어들이니까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뿐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버리고 말씀만 세우면, 말씀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처럼 내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나를 살려놓고 귀신에게서 자유롭게 해 줄 것입니다. 내 안에 말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셔서 내 안에서 살아 일을 하십니다. 그 분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변화를 입은 것처럼 여러분과 내가 오늘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중심에 세워지게 될 때에 말씀이 능히 여러분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그 분과 관계를 맺으십시오.

    어떻게요? 나도 버리고 내 옳음도 버리고 내 안에 주님만 세우십시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나사로야, 나오라.” 언제 주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죽어 무덤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때 주님이 나사로에게 일하셨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죽음의 자리, 썩어 냄새나는 자리, 갇혀 있는 자리, 결박된 자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 그 자리에 내가 있을 때 주님은 일하십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점이 나오는데, 우리가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입니다. 여러분 연약하다는 의미 알지요?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아이, 이른 봄에 올라오는 새 순, 이런 것들을 보고 연약하다고 합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태, 무방비 상태를 연약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하는데 마음으로는 옳은 것, 반듯한 것, 정직한 것 등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할 때 잔소리해야 한고 간섭해야 하고 할 말이 많아요.

    그런데 진짜 할 수 없는 그 자리에 서면 주님이 찾아오시더라고요. 38년 된 병자에게 주님이 찾아오셨고, 강도 만나 벗겨지고 버려진 친구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사람들에게 버려졌을 때 예수님이 찾아와서 풀어주셨습니다. 그 때 주님이 오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일하지 말고 주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내 자신을 마음껏 펼쳐 놓으십시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썩어서 냄새가 나지만, 주님이 오시면 내 썩음이 끝나고 수많은 사람이 내게 와서 살아가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위치는 산 자의 자리가 아닙니다. 죽음의 자리, 버려진 자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 거기가 우리의 자리입니다. 거기 계시면 주님이 오셔서 “나오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실 겁니다. 그 주님 안에 사는 은혜를 입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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