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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선 | 2017.02.12 12:45 | 조회 3338


    1. 말씀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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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12. 주일 오전예배

     

    잠언 13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잘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에 우환이 없고 건강하고 마음에 걱정근심 없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질수록 불행해지고 어려워지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아무렇게나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돼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가 아닌 영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원합니다. 영원을 사모하고 거룩을 원하며 죄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것이 안 됩니다. 죄를 싫어하지만 죄를 제일 많이 짓는 게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살인 도둑질 이걸 죄라고 생각하는데 죄가 아닙니다. 그건 범죄라고 돼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일어나는 악한 생각 미움, 시기, 질투, 교만, 음란, 살인, 간음, 악독 등- 이런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하루에도 수만 번 그 마음 품고 살 겁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다가 밖으로 나타날 때 사람들은 더럽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밖으로 표출이 되기 전까지는 좋은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세상에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나쁜 사람만 있고 다 죄만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거짓돼!”

    정상적인 거울은 크든 작든 항상 눈금이 0을 가리킵니다. 그 위에 올리는 물건의 무게에 따라 눈금이 달라지지만 물건을 내리면 다시 0으로 돌아옵니다. 우리 인생의 시작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너는 나를 버렸어. 너는 나를 거역했어! 너는 나를 멸시했어.”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게 시작점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뭐라고 하는지. 인간을 보고 악하다, 거짓됐다, 나를 버렸다, 멸시했다, 떠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안 잡아주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짓밟고 무시하고 멸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편119:11]라고 다윗이 간증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말씀을 두고 사는 사람이 있고, 자기 생각을 두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화해 보면 대부분 압니다. 나도 마음에 말씀 두고 산다고 막 떠듭니다. 그런데 이야기해보면 말씀 하나도 없고, 자기의 옳은 생각, 반듯한 이야기, 깨달은 이야기, 자기 경험 전부 다 그 얘기만 합니다. 성경이 어떻고 하면서 끼워 맞춰서 자기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더럽고 추하고 악한 자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를 무너뜨리고 자기를 깨뜨린 이야기를 하지 자기를 세우는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오늘 제가 읽었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 구절 안에는 두 가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 패망을 이룬다. 누가 말씀을 멸시합니까? 이사야1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기록해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인데요. 그 백성이 여러분이라 생각하고 한번 읽어보십시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이사야1:1~2]

    그들은 여러분과 저이고 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과 나를 보고 하나님을 거역했다고 말합니다. 아멘이 됩니까? 제가 여러분보고 이렇게 말하면 받아들이겠습니까? 성경 생각 없이 읽으면 그냥 읽고 넘어갑니다. 저는 목사로 여기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 나 거역했어.”라고 말합니다. 전 아니라고 싸운 적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한테 가르쳐준 게 있습니다. “, 나 거역했어. , 나 무시하고 멸시했어. , 나 짓밟고 버렸어.” “아닙니다. 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복음 전했습니다. 역사했습니다. 귀신 쫒아내고요.” “아니야! , 나 버렸어. 나 무시했어.” 하나님은 안 받으시더라고요.

     

    두 번째, 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이사야1:3]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소보다 못하고 나귀보다 못하다 이야기하십니다. 짐승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잠언 30장에도 보면 짐승보다 못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보고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저를 두드려 팰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읽으시면 됩니다. ‘박희진이는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박희진이는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그럼 내가 소보다 못하고 나귀보다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왜지요? 소는 주인이 고삐를 끌면 끄는 대로 따라갑니다. 싫든, 좋든. 그러나 우리는 안 따라 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안 따라갑니다. 거부합니다. 싫어합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하나님 말씀 안 듣습니다. 우리 그렇게 살잖아요. 그런데 지금 여기 와서는 하나님 잘 믿는 것처럼 앉아 있잖아요.

    4절에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범죄한 박희진이요. 허물 진 백성이요. 허물 진 박희진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악의 종자인 박희진이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행위가 부패한 박희진이요. 저보고 슬프다, 범죄 밖에 안 한다. 허물진 인간이다. 행악의 종자라. 내 행위가 썩었다.”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을 거역한 적도 없고, 만홀히 여긴 적도 없는데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버렸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겼다는 겁니다. 제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버렸다는 겁니다. 왜요? “너는 내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네 생각 따라 살고 있잖아. 너는 말씀보다 네 생각을 자주 받아들이잖아. 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정말 맞습니다. 저는 목사인데도 그렇게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행악의 종자라고 하는데 이건 많이 들어서 조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 날 멸시했다.” 도대체 안 받아들여집니다. 내가 하나님 버렸으면 여기 있겠습니까? “, 나 버렸어. 목사란 이름 가지고 나 버리고 살잖아. 내 말 안 듣잖아.” ,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다고 하는데 안 버렸다고 할 분 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 본 적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5~6절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온 머리가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내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은 모두 정상이 아니라 썩은 것입니다. 정말 더럽고 가증하고 악한 자입니다. 행악의 종자, 하나님을 버린 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말씀을 안 믿을까요? 내가 온전하다고 생각하니까, 내 생각을 믿고 깨달은 것을 믿고 느낌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 열심히 나오지만 하나님은 우리보고 떠났다고 합니다. 멸시했고, 거역했다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7절에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된 같이 황무하였고

    사정없이 버려지고 짓밟혀지는 겁니다. 왜요? 하나님을 버리고, 멸시하고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실질적으로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열왕기하 7:1~2]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양식이 없어 너무 괴로워하면서 살아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마리아 성을 향해 말씀했습니다. “내 말 들어라.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라고 하셨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내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라.”라고 했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 한다고 말씀하셨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일이면 양식이 풍족해지니까 기다려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2절에 왕의 신임을 받는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보고 하는 말이 그걸 말이라고 해? 네가 믿는 그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 봐라, 구멍을 내 봐라.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냐? 이 상황 안 보여? 먹고 살려고 해도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판에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위로를 해도 어느 정도 해야지.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라는 겁니다. , 그 사람이 배운 지식과 경험에 의하면 엘리사의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지식에 의하면 성경이야기는 말도 안 되고, 내가 하는 이야기는 우스운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겁니다. 성경 한 장을 넘겨 보십시오.

     

    16~20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의 한 말대로라 일찍이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한즉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그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었으되 곧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죽었더라

    한 장관이 하나님 말씀을 멸시했습니다. 멸시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멸시하면 죽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와 종을 무시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처럼 여러분 저주 받습니다. 그래서 하지 말라는 겁니다. 믿으면 복을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너는 먹지 못해. 너는 죽어.’ 그 말입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죠? 그리고 밟혀 죽습니다. 처음에 말을 무시하고 멸시해서 안 믿었더라도 두 번째 말씀을 듣고 마음을 돌이켰으면 이 친구 밟혀 죽었을까요? 안 죽었겠죠?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괜찮아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네가 네 눈으로 봐.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해. 너 죽어.” 그랬을 때, “내가 죽습니까? 왜 죽는데요?” “하나님이 반드시 이 일을 이루셔.” “그래요? 난 몰랐는데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하면 제가 먹을 수 있나요?” 만약 그 마음을 들고 나와서 엘리사하고 교제가 됐다면 엘리사가 이 장관에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줬겠죠? 그렇죠? 그 사람 죽지 않도록 이끌어 줬겠죠? 아예 무시하고 안 듣는 겁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죠.

     

    열왕기하 5장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다가 나은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을 듣고 문둥병이 낫자 엘리사에게 자기가 가져왔던 은금패물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그걸 거부해서 나아만이 그걸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걸 보고 있던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우리 주인은 너무 고지식해. 나아만이 가지고 온 것을 좀 받지.’하면서 엘리사 몰래 나아만의 뒤를 쫓아갑니다. 나아만이 게하시를 발견하고는 자기를 구해준 은인의 제자니까 얼른 수레에서 내려서 게하시를 맞이합니다. “어쩐 일로 급히 뛰어오느냐?” “, 다른 게 아니고 당신이 떠난 후 갑자기 생도 두 명이 와서 옷 두 벌하고 은 한 달란트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아이고 잘 됐네. 그렇잖아도 드리려고 싶었는데 안 받으셔서 그냥 왔는데 너무 잘 됐네.” 하면서 옷 두 벌과 은 두 달란트를 줍니다. 게하시가 그걸 집에다 숨겨놓고 다시 엘리사에게 갑니다. 엘리사가 어디 갔다 왔냐고 물어보니까 아무데도 안 갔다고 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알겠다.” 하고 넘어간 게 아니고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네가 금과 은을 받느냐? 그가 수레에서 내려서 너를 맞이할 때 내 마음에 감각되지 않더냐?”하고 책망하지요? 이 대화를 보면 이 친구가 끝까지 입을 안 엽니다. 그 다음을 보면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가 네 자손에게까지 영원토록 미치리라.”라고 엘리사가 말합니다. 그래도 게하시는 입 다물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 친구가 엘리사 집에서 나오는데 문둥병이 생기는 겁니다. 게하시에게 얼마든지 이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끝까지 입 다물었습니다. 결국엔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엘리사를 스승으로 섬기고 살지만, 게하시의 마음에 엘리사는 사람이지 하나님의 종이 아니었습니다. 무시하고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앞에서 거짓말해도 되는 사람이고 자기 마음을 속여도 되고요, 마음을 안 내놓아도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았을지라도 이 문제 앞에서 , 지금이 어느 때인데  남종과 여종을 받고 은금폐물을 받을 때냐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가리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 문둥병 싫어요. 잘못했어요.”하고 마음을 내놓았으면 해결됩니다. 그런데도 안 내놓습니다. 결국은 문둥이가 됩니다. 문둥병이 안 걸릴 수 있는 기회가 게하시에게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입을 다물었습니다. 게하시는 마음이 높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종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니까 문둥이가 되는 겁니다. 나아만도 분명하게 게하시처럼 엘리사를 무시하고 떠났었습니다. “나보고 요단강에서 씻으라고? 됐다! 내가 아마나와 바르발 강물에 씻으면 안 되겠냐? 어찌 똥물에 씻냐! 더러워서 안한다!” 그러다 나아만은 마음을 바꾸고 요단강에서 몸을 씻어서 문둥이 낫는 걸 자기 눈으로 봤습니다. 이제 나아만은 상천하지에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청컨대 당신은 종의 예물을 받으소서.” 그렇게 나아만의 마음이 바뀌어 올라와서 엘리사에게 무릎을 꿇고 갖고 온 은금패물을 내놓습니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받으십시오. 제발 제 성의입니다.” “나 필요 없네. 하나님이 다 주신다.” 엘리사가 안 받는 겁니다.

     

    오늘 읽었던 잠언 1313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사람은 복을 받게 돼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똑같이 성경 안에 나오는, 나아만의 집에 포로로 끌려갔던 계집아이를 한 번 보겠습니다. 이 계집아이가 처한 환경과 조건은 게하시보다 백 배 천 배 어렵고 고달픕니다. 포로로 살면서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밥그릇 들고 가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든지 나아만이 기분 나쁘면 버려지거나 죽일 수도 있는,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받는 포로로 끌려가 있는 여자입니다.

    이 아이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 마음에 무슨 위로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계집아이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있는 걸 우리는 성경에서 한눈에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 주인 나아만이 문둥병 걸린 걸 알고 말합니다. “마님, 우리 주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문둥병을 고치겠습니다.” 남편이 문둥병에 걸린 거 숨기고 있는데 그걸 계집아이가 드러내잖아요. "이런! 니가! 이놈이! 여봐라! 이 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려라!" 그럴 수도 있잖아요. 이 계집아이는 죽고 사는 데 관심 없습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 왜 보냈냐? 처음엔 내가 슬퍼서 괴로워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이유가 있구나. 그렇구나! 이 나아만을 구원해서 아람나라를 구원하려고 나를 여기 보냈구나. 하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 같이 천한 여자를 이 나라에 보내어서 군대장관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네요.” 입을 엽니다.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잘못 되면 현장에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이 계집아이는 입을 열어서 뭘 얘기합니까? “우리 주인님이 문둥병 걸렸는데 이 나라 약으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낫는 게 아닙니다. 나아만 주인님이 사마리아 선지자 앞에 가시면 선지자는 우리 주인님 문둥병을 고쳐줍니다.”

    똑같은 믿음의 사람인데 게하시는 왜 그렇게 삽니까? 게하시는 계집아이보다 성경도 많이 알고 역사도 많이 압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 시대보다 성경 많이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믿음으로 안 살고 게하시처럼 살고 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계집아이와 게하시의 다른 점이 있다면, 게하시가 사는 환경은 계집아이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 속에 살고 있지만 게하시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겁니다. 계집아이는 위로받을 만한 조건이 아무것도 없지만 그 마음에는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차이가 그겁니다. 이 아이는 정말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고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자기 생명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누가 그 삶을 지켜줍니까? 하나님이 이 아이를 지킵니다. 계명을 두려워하는 계집아이는 상을 받습니다.

     

    성경에 이런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열왕기하 1장에 가면 오십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하시야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의 종 엘리야에게 보냈던 첫 번째 오십부장과 두 번째 오십부장이 죽습니다. 이에 세 번째 오십부장이 보냄을 받고 하나님의 종을 찾아가서 뭐라고 합니까?

    이에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저가 엘리야에게로 올라가서 본즉 산 꼭대기에 앉았는지라 저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찌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그 오십인을 살랐더라 왕이 다시 다른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저가 엘리야에게 일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엘리야가 저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찌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그 오십인을 살랐더라 왕이 세번째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보낸지라 세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 이르러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 오십인들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저를 두려워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엘리야가 곧 일어나 저와 함께 내려와서 왕에게 이르러

    [열왕기하1:9~15]

    이들이 한 이야기는 틀린 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죽었습니까? 왕이 시키는 대로 하며 왕의 말을 순종했지만, 하나님의 종은 네 말대로 내가 하나님의 종이면 불이 내려와 살라버릴 거다.”하며 불태워 죽여 버리잖아요. 그들은 엘리야를 무시했기에 죽은 겁니다. 말씀을 멸시한 자는 패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오십부장과 오십인도 첫 번째 오십부장과 오십인처럼 똑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왕이 속히 내려오라 합니다. 이 두 번째 오십부장은 진짜 멍청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오십부장이 죽은 걸 알았다면 왜 죽었을까?’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사는 사람입니다. “그냥 속히 내려와요. 왕이 오라 했어요. 빨리 오지 않고 뭐해요?” 이 말입니다.

    세 번째 오십부장은 첫 번째, 두 번째 오십부장들이  죽은 이유를 압니다. ‘내가 살려면 어떡해야지? 첫 번째, 두 번째 오십부장과 같은 말을 하면 나도 죽을 텐데 다른 말을 해야겠다.’ 세 번째 오십부장은 하나님의 종을 찾아서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나와 내게 있는 오십인들의 생명을 귀히 보소서. 첫 번째 지난번에 오십부장둘과 오십인이 불이 내려와서 다 태워 죽였습니다. 우리를 죽이지 말고 살려주소서.” 이 세 번째 오십부장은 올라와서 왕의 이야기를 하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 마음에는 왕보다 엘리야가 더 크고 자신이 죽고 사는 것이 왕의 권세에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왕의 말 한마디에 내 인생이 바뀌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종의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는구나.’ 세 번째 오십부장은 그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종을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함으로 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삽니다.

    열왕기하 3장에 나오는 여호사밧 왕도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고 은혜 입히는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오십부장과 오십인, 두 번째 오십 부장과 오십인은 불타죽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무시하고 멸시해서입니다. 나아만처럼 우리가 말씀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아만은 가다가 마음을 바꿉니다. 그러니까 나아만은 살고 복을 받지만 게하시는 그 마음을 못 바꾸니까 문둥이가 되어서 버림을 받습니다.

     

    성경하나 찾아봐드리겠습니다. 시편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8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여기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대하고 믿는 사람은 죽음의 장소로 가도 살아나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오십부장 둘과 오십인들은 죽습니다. 미련하고 둔한 게하시는 생각에 끌리고 욕망에 눈이 어두워져서 문둥이로 버림을 받지만 아무도 없는 적지에 포로로 끌려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을 사는 계집아이는 복을 받고 삽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형편이 그를 슬프게 못 한단 말입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형편이 계집아이를 짓누르고 있어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경외하는 마음이 그를 기쁨으로 가득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하나님의 종과 함께 살고 있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눈이 어두워져 있으니까 불행하고 저주를 받아 비참한 길로 가야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돈과 재물에 끌려가는 마음을 내놓으면 고침을 받고 변화 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마음을 닫아버리기 때문에 그는 집안 대대로 문둥이가 되는 저주를 받고 고통을 당한단 말입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말씀을 대하는 사람은 지혜로워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나아만 집에 보낸 것은 종살이하라고 보내신 게 아니구나. 고통과 저주가 아니구나. 나아만에게 복음을 전해서 아람나라를 구원하시려는 거였구나. 나아만이 구원받기 전에는 난 죽을 수 없구나.’ 계집아이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과 문제가 와도 거기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 복음을 주셨습니까? 게하시처럼 살라고 주신 거 아닙니다. 계집아이처럼 살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사야 41장에서 하나님이 내가 너를 도와줄게. 내가 너를 지켜줄게. 너의 의로운 오른손을 붙잡고 너와 싸우던 자를 내가 싸워줄게. 네가 찾아도 만나지 못할 거야.”라고 말씀하시는데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그럼 아람나라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계집아이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나라가 복을 받고 안 받고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시고 이곳에 둔 이유가 있다면, 재물에 끌려 살라는 게 아닙니다. 계집아이가 나아만에게 복음전하는 삶을 살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주변 사람들과 가족에게 복음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면 이 시편의 말씀처럼 주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눈을 밝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잠언에서는 있는 말씀처럼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제발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십니다. 여러분 손에 있는 성경은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펴놓고 마음을 비춰보시고 말씀과 다른 마음을 도려내십시오. 그래도 안 되면 제게 찾아오십시오. 제가 도와드릴게요형제자매님들과 교제 하십시오. 그러면 가르쳐 드릴 것입니다.

    게하시가 주인님, 제가 나아만이 갖고 온 옷과 돈이 너무 탐났습니다. 그래서 거짓말로 나아만을 속여 옷과 돈을 받아와서 집에 감춰놨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마음을 들고 나왔다면 교제가 됐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교제를 통해 게하시의 마음도 바꿔주고 저주받지 않도록 해 줄 거 아닙니까? 그러면 되는데 종을 무시하니까 그걸 못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이 생각의 늪에서 우리를 이끌어내고 싶어 하십니다. 게하시는 자기 생각의 늪에 빠져서 입을 열지 않는 것 때문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게하시처럼 살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다가 말씀을 대할 때 말씀이 뭐라고 하거든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을 그대로 내어놓고 이야기 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 마음을 치료해주고, 바꿔주셔서 다시 정상적인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겁니다.

    여호사밧 왕이 여호람 왕과 같이 에돔 광야로 전쟁 나갔을 때 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다 죽을 뻔했습니다. 하나님이 그걸 미리 아시고 엘리사를 그곳에 있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종 엘리사를 찾아 나오면 문제 해결해 주라고. “왕이여, 하나님이 여기에 개천을 파라고 하십니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까 물이 에돔 편에서부터 흘러와서 에돔 광야에 가득했습니다. 게다가 칼 한 번 부딪치지 않고 전쟁에서 이기고 은금 패물 다 빼앗았습니다. 여호람 왕은 원망하고 있과 에돔 왕은 입다물고 있어도 여호사밧이 나가니까 다 살잖아요. 우리가 잘못 해도 괜찮고 문제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믿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길을 열어주신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잘못된 것이 잘못이 아니고 게하시가 눈이 어두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믿을 때 하나님은 나에게 길을 열어주신다 그 말입니다. 언제든지 성경을 펴서 주님을 찾으시면 주님은 여러분의 길이 되고 생명이 되어주실 겁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길 되신 주님이 우리를 잡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헤매도 주님은 헤매지 않습니다. 나는 잘못 되어도 주님은 잘못되지 않습니다. 그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길 때 하나님이 상을 주고 복을 주십니다. 그 주님 안에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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