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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선 | 2017.04.02 13:22 | 조회 3445


    1. 말씀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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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4.02 주일오전 말씀

     

    마가복음 111~10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썼던 재료가 흙이에요. 전도서 3장에 보면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도서3:19~21)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당신이 썼던 재료가 뭐 크게 들어서 흙이라고 합니다. 흙들 가운데 보면 원소들이 있는데 신비로운 것은 사람이 죽었을 때 화장을 하던 매장을 하던 우리 눈에 안 보이게 없애버리죠? 몸을 유지하고 있던 물질이라고 하는 이 몸은 없어지는데 그 물질을 유지하고 있던 원소는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그 원소는 내 눈에 안보일 뿐이지 우주공간 어디엔가 그 물질이 집합하고 있다가 하나님이 부르면 다시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 눈에 지금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굉장히 위대하고 괜찮은 사람이고 좋은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들을 쭉 더듬어 보면 인간이 어떤 존재라는 걸 가르쳐 주는데,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출생 자체부터 행악의 종자이고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마귀의 자식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아무리 잘해도 마귀자식이고 못해도 마귀자식이고 그렇죠? 또 사단이 이미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저주를 달고 태어납니다. 쉽게 말하면 나라는 인생은 출생 전부터 이미 저주가 결정되어있고 심판이 나한테 이미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걸 내가 피하거나 도망가거나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나한텐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자체를 부정해버리고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우리 마음에 다 밀어냅니다. 여러분 집에서 키우는 개는 아무리 좋은 옷을 입히고 매니큐어를 발라주고 머리에 리본을 달아주고 꾸민다고 해도 사람이 못 됩니다. 개는 태어날 때부터 개로 나왔기 때문에 개라는 신분을 벗어날 수 없단 말입니다. 나라는 사람도 개하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출생부터 마귀자식으로 시작해서 저주와 심판이 결정돼 있기 때문에 내가 무슨 방법으로도 이걸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다만 심판하신 하나님이 개 같은 나를 불쌍히 여겨서 심판 대신에 의의 옷을 입혀주면 내가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이 천국으로 데려가 주시니까 내가 천국 와서 사는 거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바닷가에 가면 게가 있어요. 이 게는 잘 다닌다고 하는데, 보면 항상 옆으로 기어가요. 그럼 그 게를 잡아다가 교육을 시키고, 설명을 해 주면 게가 자기가 틀린 것을 깨닫고 반듯이 걸어가나요? 이 게를 보고 반듯이 가라고 하는 자체가 미친 짓입니다. 수염 잡아 뜯고 다리를 부러뜨려도 옆으로 갑니다. 절대로 앞으로 똑바로 못 갑니다. 그러면 이 게를 반듯이 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게를 잡아다가 내 양복 주머니에 넣으면 됩니다. 그러면 내 양복 주머니에 있을 때 별 짓 다 하지만, 내 양복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동안에는 내가 반듯이 가는 만큼 반듯이 가요. 이 게하고 나하고 하나가 되면 내가 똑바로 가고 있는 동안에 게는 똑바로 갈 수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나하고 끊어지면 다시 옆으로 기어가는 놈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의를 내가 이를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이 있느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 옳은 자, 완전한 자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기를 불어 넣어서 말씀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에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은 하나님과 끊어지고 사단과 연결되어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사단이 끄는 길로 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내 의지, 각오, 결심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그 분의 세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오셔서 나를 이끌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 예수님께서 맞은편에 가면 매여 있는 나귀 새끼가 있을 거다. 풀어서 끌고 오너라.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해라. 그러면 준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나귀새끼가 매여 있을 때는 자기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매여 있는 동안에는 나귀를 잡고 있는 사람의 지배를 받고 살고 있겠죠? 그러나 이 나귀가 풀려서 예수님에게 고삐가 잡히는 순간 나귀의 삶은 달라집니다.

    출애굽기 25장에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드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에 필요한 기명들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명하여 가라사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명령입니다. 금과 은과 놋, 조각목, 청색·홍색·자색·가늘게 꼰 베실, 붉게 물들인 수양의 가죽, , 해달의 가죽, 염소의 털 등 전부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의 것을 받을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봐도 금과 은, 보석은 귀한 것인데 청색 실이나 홍색 실, 자색 실, 가는 베실, 세마포 등은 천한 것입니다. 이들이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성막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청색 실만 빠져도 하나님이 계실 수 없는 성막입니다. 죄를 씻을 수 없는 성막이고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가 이루어질 수 없는 성막입니다. 모든 것이 모여서 성막이 만들어질 때 죄가 씻기고,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과 말씀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드리기 아까워서 드리지 않은 물건들이 남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가 보면 남겨두었던 금으로 금송아지가 만들어져 삼천 명을 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방자하고 타락하고 음란하게 만들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금은 귀한 것이지만 누구 손에 잡히느냐에 따라 죽은 사람을 살리는 데에 쓰임받기도 하고,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는 데에 쓰임받기도 합니다. 그러면 금보다 귀한 여러분과 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의 손에 잡히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우주 만물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농부는 그 땅을 기경합니다. 밭의 돌을 골라내고 오물이나 거름을 뿌리기도 합니다. 농부가 땅을 엎고 똥물, 오줌, 거름을 붓는 이유가 뭡니까? 옥토를 만들어서 씨를 심고 수확을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기경되지 않은 땅에서는 곡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잡혀 있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느냐?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말씀에 잡혀 있는 사람과 잡혀 있지 않은 사람의 삶은 전혀 다릅니다. 말씀에 잡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 마음을 계속 기경하셔서 말씀이 들어가 역사할 수 있도록 일을 하십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슨 말을 들어도 짓밟고 자기 방식대로 삽니다. 그건 종교 생활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쓰고 싶어 하시느냐? 3절에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주님이 쓰시고 싶은 나귀 새끼를 풀어야 합니다. 매여 있는 상태로는 쓸 수 없습니다. 끌려온 나귀를 주님이 타시는 겁니다. 죄와 생각에 매여 있는 나를 주님이 쓰고 싶으셔서 나를 풀어주십니다. 그런데 못 풀게 하는 자가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돈에, 욕망에, 정치에, 사상에, 옳음에, 선함 등 많은 것에 매여 있습니다. 나귀를 주님이 보내신 제자들이 가서 풉니다. 나귀 같은 여러분과 나를 쓰고 싶으셔서 내가 매여 있는 데를 풀고 싶어 하시지만 못 풀게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쓸 수가 없습니다. 내가 생각에 잡혀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박희진을 박희진이 가지고 있는 옳은 생각과 사상에서 풀어서 당신의 원하는 세계로 끌고 가고 싶으신 것입니다. 나귀 새끼가 풀려서 끌려나오는 순간부터 예수님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내가 나귀라면, 내 주인은 누구냐? 전의 주인은 나를 묶어놓았지만 예수님은 나를 풀어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세계로 끌고 가고자 하십니다. 사단은 여러분과 나를 음란, 간음, , 욕망, 권력, 정치, 사상 등에 묶어 놓고 못 벗어나게 합니다. 고삐 영역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마귀가 사람을 묶어 놓습니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부족하다, 내가 옳다 등의 생각에 묶여있는 인간 나귀는 그 안에서만 뺑뺑 돌며 그 멍에를 못 벗어납니다. 예수님이 쓰는 나귀는 풀어서 끌고 오니까 같이 가는 겁니다.

     

    이 나귀가 예수님을 등에 업고 가니까 사람들이 나귀를 향하여 나귀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라고 찬양하며 절을 합니다. 나귀를 보고 절하는 게 아니라 그 나귀의 등에 있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나귀가 예수님과 끊어져서 묶여 있을 때는 그 안에서 고달프게 살다가 풀려서 예수님이 그 나귀를 타는 그날부터 나귀는 예수님과 똑같은 대접을 받는 겁니다. 나라는 인생이 사단이 허락해놓은 고삐에 묶여서 매어있는 동안에는 그 옮음 안에서 몸부림치고 살다가 거기서 쓰러져갑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을 보내서 묶여있는 박희진이를 풀어서 끌고 와서 박희진이 안에 들어와서 주님이 나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니까 박희진이가 예수님이 받는 대접을 받고 삽니다. 주님이 받는 섬김을 다 받고 누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나귀 새끼 가는 길에 옷을 깔아주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깔아주는 겁니다. 예수님을 등에 끄는 그 덕에 나귀 팔자가 예수팔자가 됩니다. 그러면 내가 끌려가는 게 좋은 겁니다. 끌려가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나가 되는 그 날 주님으로 말미암아 내 인생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을 보겠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있을 때에 많은 의원들이 나사로의 병을 고치려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나사로는 병을 낫지 못하고 죽어서 무덤에 갇히고 썩어서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앓아누웠던 여자가 많은 의원들과 만났을 때는 병이 더 중해졌고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말씀의 끌림에 따라 예수를 만났는데 그 예수님과 만나는 순간 여자의 병이 낫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갇혀있을 때 썩어서 냄새가 나고 아무도 나사로를 살려주거나 그 병을 고쳐주지 못했지만, 예수님과 나사로가 연결되니까 썩음이 그치고 나사로가 살아납니다. 예수님과 나사로가 연결되니까 죽은 것도, 무덤에 갇힌 것도 문제가 안 되고 아무것도 문제가 안 됩니다.

    나귀 등에 예수님이 타고 있는 동안에는 나귀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나도 문제가 안 됩니다. 예수님이 그 문제 다 처리해 줍니다. 발에 가시가 찔려 나귀가 절뚝거리면 예수님이 문제가 되니까 치료해가지고 타고 갑니다. 내가 병 들어있으면 주님이 타기 불편하니까 병을 고치십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직 한 번도 병이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병 때문에 죽을 수 있는데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는 동안에 어떤 질병이 찾아와도 그 병이 저를 못 끌고 갑니다. 나귀새끼는 부정하고 죽어야 되지만 예수님이 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까지 이 나귀는 예수님을 떠나고 싶어도 주님이 안 놓으시기 때문에 못 떠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잡고 있는 그 날부터 당신의 일을 이루는 그날까지 나와 함께 계셔야 되기 때문에 나를 절대로 안 놓습니다.

     

    창세기 2815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성경 읽을 때 그냥 읽지 말고 제가 한번 읽어 볼 테니 저처럼 읽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박희진이와 함께 있어 박희진이가 어디로 가든지 박희진이를 지키며 박희진이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하나님께서 박희진이에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박희진이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네가 시험이 들든지 도망을 가든 엎어지든 넘어지든 네가 믿음으로 살든지 말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내가 말씀을 따라갈 때도 함께 계시고 말씀을 버릴 때도 함께 계시고 하나님 없어!” 그럴 때도 함께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가 사단에게 끌려가도록 놔두겠어요? 여러분 자식이 물에 빠지면 그냥 놔두겠습니까? 수영하러 가도 내가 구할 수 없는 영역 밖에는 못 나가게 사전에 막습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허락한일을 다 이루기까지 나를 안 떠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나귀새끼를 타셔야만 하는지 마가복음 11장을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1:2~3]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여기서 주가 쓰시겠다고 해라. 그런데 왜 써야 되는지 설명은 안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갖고 있는 성경 마태복음 21장을 한번 펴보십시오. 여기도 보면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어요.

     

    [마태복음 21:2~5]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시온이라는 글자에 보면 자가 있습니다. 밑에 내려가 보면 이사야 6211절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약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아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셔야 합니다. 성경 이사야 62, 제가 10절부터 읽겠습니다.

     

    [이사야 62:10~12]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는 말씀은 이사야 6211절 말씀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셨단 말입니다. 영화를 찍을 때 배우들이 자기 마음대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본대로 하듯이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예언을 하셨고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나귀든지 예수님하고 연결이 되면 반드시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14절에서 나귀는 태어나기 전부터 부정해서 나귀의 첫 새끼는 목을 꺾어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살려두고 싶으면 어린 양 한 마리를 나귀 대신 죽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살아있는 나귀새끼는 대속물이 지불된 나귀새끼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가 살아있는데 매여 있습니다. 이것은 주인이 아직 안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매여 있는 나귀를 쓰고 싶어서 풀어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부정하고 목이 꺾여 죽어야 할 나귀새끼지만 예수님과 연결되니까 살아서 예루살렘에 버젓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결이 안 되어 있는 나귀는 절대로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연결된 나귀는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습니다. 또 죽고 싶어도 못 죽습니다. 여러분과 나도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이미 저주를 받았고 죄 때문에 지옥에 가도록 결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죄는 해결되었지만 생각에 잡혀있는 것을 보시고 우리를 풀어 당신이 쓰고 싶은 대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로마서에서는 돌감람나무 가지를 꺾어 참감람나무에 접붙인 이야기로 나옵니다. 돌감람나무 가지가 참감람나무에 접이 붙어져있는 동안에는 참감람나무의 진액이 이 돌감람나무 가지에 공급되어서 이 가지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고 참감람나무 가지와 똑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나귀도 매여 있는 데서 풀려 끌려와서 예수님을 등에 업었을 때 나귀가 예수와 같은 새 삶을 살게 되는 것처럼 여러분과 내가 생각의 세계에서 나와서 말씀과 연결이 될 때 이 말씀으로 말미암은 새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고 믿음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받지 않습니다.

    바다 게가 사람의 손에 잡혀서 그 사람의 주머니에 들어갈 때 게가 반듯하게 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손에 잡혀야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과 7장에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고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묶었던 옛 주인에게서 풀려 나와서 예수님이 내 주인으로 바뀌어졌을 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나를 묶어놓았던 주인으로부터 누가 풀어주느냐? 예수님이 보낸 제자들이 와서 이 나귀를 풀어서 끌고 와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시대의 종들이 찾아와서 내 마음을 묶어놓고 결박해놓은 사상과 옳음에서 나를 풀어서 예수님과 연결시키는 일을 해 줍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예수님이 내 주인이 되어서 그분의 고삐에 잡혀서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되고 그분이 받는 대접과 섬김을 내가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이 삶을 못 살도록 만듭니다.

     

    룻은 영원히 여호와의 회중에 들어올 수 없는 저주받은 모압 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버젓하게 베들레헴에 들어와서 살 뿐만 아니라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서 보아스로부터 씨를 받아 당당한 예수그리스도의 계보에 올라가는 은혜를 입습니다. 어떻게요? 나오미와 연결이 되니까 이 여자의 천가지 만가지의 저주가 문제가 되지 않고 보아스의 여자가 됩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저주받은 마귀의 자식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은혜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저주받은 인생인데, 예수와 연결되면서 모든 저주가 끝나 버리고, 예수 안에 있는 복이 나한테 다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와 연결이 되어 있는 이 나귀새끼 부정한 것도 문제가 안 되는 것 맞습니까? 나귀의 첫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목을 꺾으라고 한 하나님의 율법도 문제가 안 됩니다. 맞지요? 그것도 모를까 봐 두 번이나 기록해 놓았습니다. 출애굽기 13장과 34장에요. 인간 박희진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인데 살아 있는 이유가 있다면, 예수와 연결되니까 못 죽이는 거란 말입니다. 이사야 41장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9절부터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땅 끝에서부터 박희진이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박희진이를 부르고 박희진이에게 이르기를 박희진은 하나님의 종이라 하나님께서 박희진을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박희진이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하나님은 박희진의 하나님이 됨이니라 하나님이 박희진을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박희진을 도와 주리라 참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박희진이를 붙들리라 보라 박희진이에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박희진이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박희진이가 찾아도 박희진이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박희진이를 치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 여호와 박희진의 하나님이 박희진 의 오른손을 붙들고 박희진이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박희진이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여러분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거기에는 여러분이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싸울 자를 당신이 싸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나귀가 아무리 비실비실하고 못났어도 예수님을 등에 업고 있으면 엎어지든 누워있든 절대로 죽을 수가 없습니다. 나귀가 주님을 등에 업고 있는 동안에는 예루살렘에 당당히 입성합니다. 율법에 목을 꺾으라고 두 번이나 못 박아놔도 그것은 율법이지 예수 안에서는 정죄를 당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나귀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이렇게 이끌고 싶으셔서 풀어 끌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있으면 우리에게 임한 모든 저주와 심판이 끝납니다. 우리에게 어떤 저주가 임했다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의 모든 저주를 끝내고 당신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들고 우리와 싸우던 모든 걸 주님이 싸워주셔서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어떤 저주와 재앙도 더 이상 나를 손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 안에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야곱이 아버지로부터 복의 약속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걸 못 믿는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가서 20년 동안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열심히 삽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때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 다시 한 번 약속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 승리자다(이스라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또 다시 잔꾀를 부립니다. 그러다가 35장에 보면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벧엘에서 그때까지 야곱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갖고 있던 모든 신상과 귀에 있는 고리들을 상수리나무 아래에 모든 것을 묻습니다. 그리고 혈혈단신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 때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약속을 줍니다. 창세기 359~11절입니다.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절은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읽을 때 여러분 이름을 넣어서 읽으세요. 시작.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네가 죄인이다마는 다시는 너를 죄인이라 하지 않고 의인이라 하리라. 의인이다 이 말입니다.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오. 하나님이 나를 의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게서 나오리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겁니다. 약속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믿지 못했을 때 야곱은 20년 동안 삼촌 집에 가서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별별 방법으로 삽니다. 결국은 다 없애 버리고 하나님이 다시 그를 이끌어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약속을 이루는 일을 합니다. 야곱이 어머니 태 속에 있을 때에 주신 약속대로 살 수 있는 세계로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죄악 속에 살던 나를 끄집어내고 예수님을 주셔서 원래 창조의 목적대로 내가 살 수 있게 이끌어 가십니다. 출애굽기에서 성막을 만드는 데에 쓰이지 않은 금 즉 내 손에 잡혀 있는 금은 죽음을 불러오는 저주가 됩니다. 여러분은 누구 손에 잡혀 있습니까? 하나님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흙덩어리를 이리 치고 저리 쳐서 옥토를 만들어 결실을 내고 싶으신 겁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요셉은 애굽 백성들이 모든 것이 바닥나고 마지막 남아있는 땅과 자기까지 팔아버렸을 때 그들에게 양식을 주지 않고 종자를 줍니다. 그전까지는 양식을 줍니다. 내 것이 다 끝나버렸을 때, 나를 잡고 있는 모든 게 풀려졌을 때 종자가 옵니다. 그걸 뿌려서 수확을 해서 바로에게 오분의 일은 상납하고 나머지는 양식으로 삼아 기근을 싸워 이겨라.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잡히는땅은 그 땅이 자갈밭이든 모래땅이든 그 땅에는 씨 맺는 채소가 나오고 열매 맺는 과목이 나오지만 하나님에게 잡혀지지 않는 땅은 버려져서 잡초만 무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잡혀있는 이 땅은 생명의 씨가 나와서 우리를 살려놓고 낳고 낳고 낳는 생명육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즉 우리를 만나는 사람이 구원을 받아 생명을 얻는 기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납니다. 사탄은 그걸 못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그날부터 이 나귀가 예수와 함께 동행하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복을 입듯이 여러분도 그 예수와 함께 이 복을 누리면서 생명의 세계에 쓰임을 받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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